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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사 산청 지리산

aeast 2021. 3. 28.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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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界寺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208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지리산 천왕봉에 있는 절.

높이 1,450m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

진흥왕 5년, 544년에 조사(祖師) 연기(緣起)가 창건

고려 우왕 6년(1380) 이성계에게 패한 왜군에 의해 불탔고, 1405년 선사 정심(正心)이 중창했다

이후 수도처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1908년 일본군에 의해 불탔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또다시 불탄 채 방치되었다가 1981년 법당과 산신각, 칠성각 등이 재건되면서 겨우 절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

법당 왼쪽에 보물 제473호로 지정된 법계사삼층석탑이 있으며, 절 뒤에는 암봉(巖峰)과 문창대(文昌臺)가 있다.

지리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1,450m)한 법계사는 544(신라 진흥왕 5)년에 연기(緣起)조사가 전국을 두루 다녀본 후에 천하의 승지(勝地)가 이곳이라 하여 천왕봉에서 약 3㎞ 떨어진 이곳에 창건하였다.

용이 사리고 범이 웅크린 듯한 산세는 좌우로 매우 급하게 짜여서 오직 동남쪽으로만 트였고, 춘분과 추분에는 남극의 노인성(老人星)을 편히 앉아서 볼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찾아오기도 하며, 갖가지 동식물이 많아 경치가 빼어나다.

절의 위치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약 3㎞ 정도 내려온,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쉼터로도 각광받고 있다. 법당 왼쪽 바위 위에 세워진 석탑의 기단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그 어디에도 견줄 수 없다.

법계사는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이성계에 패배한 왜군에 의해 불탔고, 1405(태종 5)년에 정심(正心)선사가 중창했으나, 1908년 일본군에 의해 다시 소실되어 방치되었다가 1981년 겨우 절다운 형태를 갖추었다.

이 절은 일본과 미묘한 관계가 있는 절로 예로부터 ‘법계사가 일어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일어나면 법계사가 망한다.’라고 하여 여러 차례 왜적이 침범하였다. 고려 때 왜적 아지발도(阿只拔屠)가 이 절에 불을 지르고 운봉전쟁에서 이성계의 활에 맞아 죽은 일화는 심심찮게 이야기되고 있다.

법당 왼쪽에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절 뒤에는 암봉과 최치원이 법계사에 머물 때 책을 읽고, 시를 짓고, 명상에 잠겼던 문창대(文昌臺)가 있는데 문창대의 넓은 반석 앞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와 짚신을 놓았던 곳이라는 의미의 ‘고운최선생임리지소(孤雲崔先生淋履之所)’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보물 제473호로 지정되어 있는 법계사 삼층석탑은 높이가 2.5m이며, 약식화된 형태, 조형미의 투박함 등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초기의 탑으로 추정된다. 탑의 구조는 기단부로 이용된 자연 암석에 상면 중앙에 탑신을 받치기 위하여 2단의 굄을 마련하였고, 그 위에다 별석으로 3층 탑신을 얹었다. 각 옥신에는 우주를 모각한 외에는 다른 장식이 없다. 옥개석은 하면에 3단의 받침을 모각하고 상면에는 옥신을 받치기 위한 굄이 1단 모각되었다. 1층의 탑 몸체는 매우 높고 2층과 3층은 급격히 줄어들어 낙수면 경사가 심하며, 옥개는 둔후한 편으로 받침은 각층 3단이고 추녀는 전각에 이르러 약간 휘어졌다. 상륜부에는 뒤에 만든 듯한 포탄형 석재가 얹혀 있을 뿐 모두 없어졌다. 옥개석의 전각(轉角)은 약간 반전(反轉)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중후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거대한 자연암석을 기단 삼아 물끄러미 하계를 지켜보고 있는 삼층석탑, 여느 석탑처럼 화려한 수식도, 안정된 미감도 갖추고 있지 않지만 하늘 가까이 있어 맑은 푸른빛과 때로는 지리산의 아름다운 운무와 조화되어 상큼한 눈맛을 제공해 주는 탑이다. 오로지 천계(天界)로 향한 그 상승감 속에서 고려인의 외경심을 읽을 수 있다. 연무 가득한 지리산 자락을 법계사 삼층석탑은 지리산 가장 높은 곳에서 항상 지켜보고 있다.

[산청군 문화관광]

법당 왼쪽에 위치한 이 탑은 바위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몸돌 각 모서리에는 기둥을 넓게 새겼다. 각 층의 지붕돌은 두터운 편이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장식 부분에는 포탄 모양의 돌이 얹혀있는데, 나중에 보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바위를 기단(基壇)으로 이용한 탑은 신라 이후로 유행하였는데, 이 탑처럼 아래 기단부를 간략하게 처리한 경우는 드물다. 양식이 간략화되고 투박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전형적인 신라석탑 양식에서 벗어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19년 6월, 지리산 종주를 하며 잠시 법계사에 들르다.

6월 14일, 남부터미널에서 중산리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타서 다음날 새벽에 중산리 도착

동이 트지 않은 새벽부터 깜깜한 산길을 홀로 걷자니 좀 으스스한 분위기.

천황봉을 오르는 중간에 위치한 로터리대피소에 도착하면 식수와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

로터리대피소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법계사에 갈 수 있다.

천황봉 오르는 길이 워낙 급한 관계로 산비탈을 타고 조성한 절이라 평지나 산중턱을 적절히 깍아서 조성한 절과는 다르다.

산비탈을 따라 건물들이 들어서있다.

위태롭다기보다는 산사의 맛이 제대로 난다.

다른사람들처럼 일주문에 배낭을 두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절로 들어간다.

'법계사가 망하면 일본이 흥하고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출처 미상의 전설이 절 소개에도 나와있다.

아마 지리산에서 왜구 아기발도와 이성계간의 일전을 두고 나온 이아기 같은데...

높은 곳에 위치해서 바라보면 일본이 보일 것 같기도 하다.

5대 적멸보궁에도 포함되지 않으나 법계사도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이다.

사찰 아래쪽에 적멸보궁이 위치하고 있다.

적멸보궁에는 본존불이 안치되어 있지 않고, 진신사리가 모셔진 바위위 삼층석탑을 향해 예배를 올린다.

단위에는 밖으로 통하는 창이 설치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

자연암반을 하부 기단부로 삼은 독특한 양식이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보물 제473호. 높이 2.5m. 거대한 자연암석을 기단으로 삼고 그위에 3층 탑신(塔身)을 세웠다. 석탑의 구조는 기단부로 이용된 자연암석에 상면 중앙에 탑신을 받치기 위하여 2단의 굄을 마련하였고, 그 위에다 별석으로 3층탑신을 얹었다.

각 옥신(屋身)에는 우주(隅柱)주 01)를 새긴 외에는 다른 장식이 없다. 옥개석(屋蓋石)은 하면에 3단의 받침을 새기고 상면에는 옥신을 받치기 위한 굄이 1단 새겼으며 낙수면은 경사가 심하다. 옥개석의 전각(轉角)은 약간 반전(反轉)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중후한 감을 주고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현재 포탄모양의 석재가 얹혀 있기는 하나 이는 뒤에 보수하면서 얹혀진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규모도 크지 않고 조탑양식에서도 약식화된 점이 있고, 조형미에도 투박한 감을 주고 있어서 전형적 신라석탑 양식에서 벗어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 위에 조성된 산신각

산비탈을 따라 층층히 조성된 법계사

산사의 정서가 느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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