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Outdoor

검단산

aeast 2020. 11. 8.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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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0일 같이 일하는 부장님과 검단산 산행을 하였다.

백패킹을 같이 하자고 작년부터 졸랐는데 우선 산행부터 하는 것으로 하여 둘이서 산행을 하게되었다.

하산하는 길에서 만난 등산로 안내

 

7시에 5호선 강동역에 내려 하남방향으로 가는 341번을 타고 에니메이션고에서 내려 8시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유길준묘소, 헬기장을 통해 정상까지 오르는 3.8km 코스로 올랐다가, 곱돌약수터, 현충탑을 통해 에니메시션고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산행이었다.

11시에 내려와 점심을 하였으니 왕복 3시간 소요된다고 볼 수 있다.

북한강을 조망할 수 있다는 코스라고 하는데 산행 내내 안개가 짙어서 감상할 수 없었으나, 짙은 안개 속에서 간간히 안개비가 내리는 운치있는 산행이었다. 정상 직전 안부에서 잠시 안개비가 낙엽위로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몇년만인지. 옅게 비가 스치는 날에는 산행이 답이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검단산 오르는 길

 

오르는 내내 오르막 길이 계속 되는, 좀 지치게 하는 등산길이었다. 정상 근처에서나 안부가 조금 있어 숨을 돌릴 수 있다.

계속되는 오르막길
검단산 정상 가는 길
등산 중 만난 잘생긴 소나무, 보호하기 위해 주위를 줄로 쳐났다.

 

안개속에서 정상에 도달.

정상에는 천막을 치고 계란과 막걸리를 팔고 있었는데, 우리는 군자역에서 산 2천원짜리 김밥을 나눠먹고 사진 한방 찍고 하산하였다

검단산 정상의 쓸쓸한 모습

 

정상에서 곱돌약수터까지 약 5백미터는 정말로 이만한 곳이 있었을까하는 비현실적으로 급한 경사였다.

이후 하산길이야 평탄한 산길을 굽이돌아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편한 길이었다.

등산용품점들과 식당들이 섞인 산 아래에서 소고기 수육과 소주 2병을 마시고 청국장을 나눠 먹은 후 알딸딸하게 집으로 복귀.

 

[WIKIPEDIA]

검단산(黔丹山)은 경기도 하남시광주시에 걸쳐 있는 높이 657m의 이다. 서울 근교에 있고 교통은 편리하지만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산세가 특이한 것이 특징이며 가파른 경사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면 사방의 전경이 시원하게 열리고, 서서히 정상에 오르는 길이 매우 다채롭다.

또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이며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맥과 연결되는 산줄기이다. 산의 최정상부는 면적은 넓지 않지만 평탄한 면을 이루고 있어 헬리콥터 착륙장이 건설되어 있다.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남한산(南漢山)의 한 줄기로 이어내려와 하남시 춘궁동·초일동·광암동 등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이성산성([二聖山城)이 있는 이성산(二聖山)과 금암산(金岩山) 그리고 일자산(一字山) 등이 이어지는 산이다. 삼국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초기 한성백제에서 쌓은 위례성의 외성(外城)이 있던 산으로 보인다.

백제 한성시대 하남 위례성의 숭산(崇山), 진산(鎭山)으로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이라 전해진다.[1]

또한 백제 때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이곳에 은거하였다 하여 검단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2]

본래 세종대왕의 능을 이곳에 쓰려다 여주로 옮겨가게 되어 닦아 놓은 능터가 아직 그대로 남아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며,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의 묘가 있다.

검단산의 유래에 대해서 대략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백제시대 검단선사(黔丹禪師)가 그 산에 은거하였어서 선사의 이름을 따서 검단산(黔丹山)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검단선사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북 고창의 유명한 사찰 선운사(禪雲寺)의 창건 설화 중 신라진흥왕이 세웠다는 것과 백제 위덕왕(525년 ~ 598년) 24년인 577년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세웠다는 것이다. 만일 동일인이라면 검단선사가 검단산에 있었던 것은 6세기 중반이라는 얘기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검(黔)'은 한자 뜻이 '검다'인데 고조선 때 단군왕검같이 제사와 정치의 기능을 겸한 제정일치 사회의 우두머리를 '왕검(王儉)' → '임검(壬儉)' → '임금'이라 불렀듯이 '검(黔)'은 '금'이 되어 즉, '크다, 신성하다'는 뜻이라 해석하고 단(丹)'은 현재의 한자 뜻인 '붉다'와는 다른 '제단'이란 뜻으로 '검단산'은 '신성한 제단이 있는 산'이란 뜻으로 해석했다. 한때는 검단산의 검(黔)을 '금'으로 읽어 '금단산'으로 부르기도 했고 실제로 한성백제(漢城百濟) 시절에 왕이 검단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3]

또한 검단산은 한강과 인접해 있어 산세의 막힘이 없고 동, 서, 북 3면의 조망이 뛰어나며, 남한강, 북한강과 팔당댐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이 한강에 접해 있으므로 각처에서 한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物産)의 집산지 였기에 이곳에서 '검사하고 단속하였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산 입구에 창우동(倉隅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창우동이란 '창고가 있던 곳'이란 뜻이다.

백제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위례성의 외성(外城)이 있던 산으로 검단산 일대는 백제 시조인 온조왕 4년 이래 근고초왕 26년까지 무려 370년을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위례성을 검단산과 남한산의 북쪽 산줄기 가운데 '고골' 일원으로 추측된다는 얘기도 있다.[4]

검단산 정상에는 조선시대까지 봉수대가 있었고 최근까지 군부대가 있었다. 정상은 단체게임을 하고도 남을 만큼 넓은 공터가 있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팔당호수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사방으로 막힘이 없어 해돋이나, 해넘이 구경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한남정맥의 지맥 끄트머리에 솟아 한강을 사이에 두고 운길산, 예봉산과 이웃해 있는 검단산은 서울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산 높이는 관악산과 비슷하지만 동국여지승람에서 이 산을 '광주목의 진산'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산세가 특이하다. 처음에는 가파르게 고도를 높이다가 마루금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전경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