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아남그룹 명예회장 김향수의 한일 문화유적 탐방기

aeast 2021. 6. 13. 15:06
728x90

한국 전자산업의 개척자인 김향수씨는 한일고대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평생 공부를 하였다.

아마 '신동아'에 기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의 한국문화 탐방기.


“일본 큐슈는 가야의 分國이었다”

 

《현해탄을 가로질러 일본 규슈에 도착했을 때 나는 거기서 가야의 후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천손 강림 신화」는 바로 가야의 선조들을 맞이하는 역사였으며, 지금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찾아가 바로 그들의 신사(神社)에는 가야의 조상신들이 모셔져 있었다. 규슈는 바로 가야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일본 규슈(九州)지방 구마모토(熊本)현 야쓰시로시(八代市)에 있는 야쓰시로신사 八代神社 (妙見宮).

「묘견공주」를 제신(祭神)으로 모시는 곳이라 해서 일명 묘견궁(妙見宮 )이라고도 부르는 이 신사를 찾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구마모토 공항에 내린 다음 택시로 약 40분 거리에 있는 구마모토역으로 달려가 다시 기차로 갈아타고 야쓰시로역까지 가야 한다. 거기서 또 택시를 잡아타고 동북쪽으로 약 4km 가야 웅장한 묘견궁이 나타난다.

지리적으로 일본 열도 최남단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야쓰시로신사는 한국인이라면 한번쯤 마음먹고 찾아볼 만한 곳이다. 이 신사의 주인공은 묘견공주, 일본어로는 히미 코(卑彌呼)라고 부르는데 그녀가 한반도에서 도래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신사 안에 오롯이 간직돼 있다고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한일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충격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일본국가의 기원』을 저술한 일본 사학자 이노우에 마쓰사다(井上光貞)는 묘견공주 히미코는 규슈 일대에서 29개의 소국 5만호(戶)를 평정, 야마대국(일본 최초의 나라)의 여왕이 된 인물로 일본 왕가의 전설적인 시조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라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 왕가의 조상이자 일본의 건국신인 묘견공주 히미코가 바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度來人)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전설 속의 여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가야의 건국시조이자 나(김해 김씨)의 조상이기도 한 김수로왕의 딸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추론이 제기된 후 나는 그녀의 흔적이나마 추적하고 싶었다.

내가 이 전설의 여왕을 만나기 위해 신사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인들은 신사 하면 으레 일본전범의 위패를 안치한 야스쿠니신사를 쉽게 머리에 떠올리지만, 일본 인들에게는 신사는 신앙의 터전이자 생활 그 자체이며 일본역사의 터전이다. 그들은 숭앙해 마지않는 위대한 인물들의 위패를 신사에 모셔놓고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어 모신다. 이런 신사는 일본의 마을마다 가장 정숙하고 정결한 곳에 세워져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신사를 찾아가 자신들의 소원을 빈다.

그런데 신사, 특히 신사에 봉안된 인물들을 추적하다 보면 의외로 감추어진 역사의 「속살」을 볼 수 있다는 게 오랜 세월 일본을 드나들며 얻은 나의 문화유적 탐사 체험 이다.

나는 야쓰시로신사 탐사에 앞서 히미코에 대한 자료들을 뒤져보았다.

기록에 의하면 히미코는 서기 148년에 태어나 179년에 야마대국(邪馬台國)의 여왕에 올라 69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99살이던 247년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특히 중국의 정통 사서인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은 『사람들이 모두 한 여자를 받들어 왕으로 모시니 이름은 비미호(卑彌呼;히미코)였다. 그녀는 귀신의 도(鬼道)를 섬기며 능히 무리를 현혹케 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지아비 없이 살았으며 남자동생이 옆에서 국사를 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행히도 히미코가 김수로왕의 딸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기록한 역사책은 없는 듯하다. 다만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비미호(히미코),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왕후(神功王后)와 『고사기』의 난생녀(卵生女),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세오녀(細烏女)와 「김해김씨왕세계」의 신녀(神女) 기록이 히미코의 생존연대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은 이들이 동일인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특히 「김해김씨왕세계」에서는 「위지왜인전」의 기록을 뒷받침하듯, 「신녀」가 남자동생과 함께 어디론가 건너갔음을 묘사하는 구절도 나온다.

『선견(仙見)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자가 신녀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나버렸다. 왕(김수로왕의 장남이자 가야국 2대왕인 거등왕)은 강가에 있는 돌섬 바위에 올라가 선견왕 자를 부르는 그림을 새겼다. 그래서 이 바위는 왕의 초선대(招仙臺)라고 전해지고 있다』

비록 「김해김씨왕세계」가 정통 역사서는 아니지만 이 기록은 한일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역사기행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얽힌 이야기를 좀더 풀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에서 건너온 공주 허황옥(許黃玉)은 한반도에서 최초로 국제결혼을 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슬하에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다. 장남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2대왕(거등왕)이 되었고, 둘째왕자는 허왕후가 죽은 후 허씨 가문을 잇도록 하기 위해 성을 허씨로 바꾸어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이 때문에 지금도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머지 8명의 왕자 중에서 7왕자는 허황옥의 오라버니, 즉 외삼촌이 되는 보옥선사(寶玉禪師)를 따라 고령에 있는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으며 그후 방장산(지리산)에 들어가 성불(成佛)한 후 승운이거(乘雲離去)했다고 전해진다.

두 공주는 『편년가락국기』에서 한 공주가 신라의 석태자(昔太子)에게 시집갔다고 나타나 있다. 결국 한반도에서 전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인물이 나머지 1명의 왕자와 1 명의 공주다. 바로 이들이 선견왕자와 묘견공주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허왕후의 정체를 찾기 위해 일본은 물론 멀리 인도까지 직접 탐사한 뒤 『가락국기』라는 저서를 남긴 작가 이종기씨(작고)도 묘견공주 히미코가 가야 김수로왕의 두 공주 중에서 둘째 공주가 틀림없다고 단정하기도 했다. 과연 그렇게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쌍어문과 구사와는 가야 표식

나는 야쓰시로신사에서 묘견공주의 흔적이 될만한 것은 샅샅이 훑어보기로 했다. 야쓰시로 신사를 소개하는 팸플릿에는 제신(祭神)을 하늘의 중심이 되는 신이라는 뜻의 「 천어중주신(天御中主神)」과 국가가 받들어야 할 신이라는 의미의 「국상입존(國常立尊)」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또 묘견궁 입구에도 「황국 최초의 신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한마디로 야쓰시로신사의 주인공인 묘견이 일본국가 기원의 중심적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묘견공주신을 모신 본궁에는 위패만 덜렁 모셔져 있어 다소 실망스러웠다. 사실 일본의 신사는 대부분 신사에 위패만 모셔놓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신사 본궁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동안 나는 언뜻 남대문(정문) 처마 끝에 조각돼 있는 신수(神獸) 기와를 발견했다. 몸체는 거북, 머리는 뱀의 형상을 한 전설 속의 구사와(龜蛇瓦)였다. 더욱이 기와지붕 꼭대기에는 머리는 용의 형상인데 몸체는 물고기로 만든 한 쌍의 조형물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틀림없는 쌍어(雙魚) 문양이었다. 나는 이것들을 보고 한동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모양이 이역만리 먼 곳, 그것도 남의 나라 땅에 새겨져 있을 수 있는가.

안내판에는 이 신사가 1186년에 지어졌다고 기록돼 있다. 한반도에서는 고려왕조가 들어섰던 무렵인데, 왜 이 신사의 건축가들은 다른 신사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상징물들을 만들었을까. 그것도 아주 세련된 형태로 보아 매우 정성들였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당시의 조각가들이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고유한 상징물들을 그대로 재현했는지, 아니면 조각가들 역시 한반도에서 도래한 가야의 후손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문양을 만들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것들이 한반도의 옛 가야국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상징들이란 점이다. 거북은 가야의 건국신화에 중요하게 등장하듯 가야를 상징하는 동물이요, 쌍어문양은 한반도에서는 가야왕조에서만 나타나는 왕가의 문양이다. 지금도 김수로왕릉 경내 문틀 위에는 신어상(神魚像) 한 쌍이 서로 마주보게 새겨져 있다. 결국 묘견궁에서 발견되는 구사와와 쌍어문양은 묘견공주가 바로 한반도의 김수로왕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결정적 증거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들도 묘견공주가 어디에서부턴가 배를 타고 야쓰시로에 당도했는데, 그 해로(海路)가 아마쿠사제도(天草諸島)의 묘견포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 야쓰시 로 현지 주민들은 매년 11월22일부터 이틀간 거행되는 묘견제(妙見祭)를 규슈지역 3대 마쓰리(일본인들의 축제)로 삼을 만큼 묘견공주에 대한 숭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마쓰리 때는 묘견공주의 야쓰시로 당도를 재현해 커다랗게 만든 구사(龜蛇)를 어깨에 메고 시가행진을 하는가 하면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줄다리기 등 각종 민속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묘견궁을 둘러본 후 나는 5백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시라기야마(白木山: 일명 영부산(靈符山)) 기슭의 영부신사를 찾았다. 묘견궁의 말사이기도 한 영부신사는 그 전신이 「진구지(神宮寺)」로 원래 묘견궁 동쪽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는데 소실되었고, 그후 795년(桓武天皇 14년)에 다시 조성돼 8백여년간 존속하다가 1600년대 초 또다시 소실 돼 현재의 자리에 옮겼다고 기록돼 있다.

시라기야마를 영부산이라 부르는 것도 이유가 있다. 이 산에 영부신사를 지으면서 묘견궁에 보존하고 있던 태상신선진택영부존상(太上神仙鎭宅靈符尊像; 약칭 태상존상)이 라는 신체(神體) 조각상과 태상비법진택영부(太上秘法鎭宅靈符)라는 부적 목판본 1점을 옮겨오면서 산 이름도 자연스럽게 「영부」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

천년의 신비를 담은 부적

돌계단을 밟고 산기슭에 자리잡은 영부신사에 올랐다. 그러나 막상 신사에 도착해보니 그 중요성에 비해 신사는 규모가 무척 왜소하고 초라했다. 나는 신당에 보존중인 태상 존상과 태상영부를 보고 싶었으나 신사를 지키는 관리인도 사무소도 없었고, 신당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을 뿐이었다. 신당문은 1년에 단 한 차례, 그것도 일정치 않은 날에 열린다는 것을 마을주민에게 들었다. 내 마음은 초조했다. 어쩌면 영부를 통해서 묘견공주와 가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날아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궁리 끝에 야쓰시로시 공무원을 찾아가 부적을 구해볼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그 공무원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이곳저곳에 연락해보고 수소문하더니 금판(金版) 영부 탁본 복사지 1매를 구해주었고, 목판 영부를 간직하고 있는 일본인 향토사학자까지 연결해주었다.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성심성의를 다하는 일본 공무원들의 친절함에 고마 움과 함께 부러움을 느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오늘의 경제대국을 이룬 원동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목판 진본을 가지고 있다는 향토사학자를 찾아갔다. 이름을 시라기(白木)라고 밝힌 그 소장자는 수십대 선조때부터 가보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라면서, 낡은 가죽가방에 든 목판 영부를 신주 모시듯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빨강, 파랑 등 오색 천으로 된 보자기를 하나하나 풀자 신비의 목판 영부가 나타났다. 네 등분된 목판을 방바닥에 놓으니, 천년의 신비를 갖춘 자태가 황홀하기까지 했다. 목판 탁본을 수백 번 뜬 탓인지 목판은 먹물이 배 전체가 검은색이었으나 보존상태는 무척 양호했다. 시라기씨는 『진택영부 는 원래 목판, 동판, 그리고 그것들의 탁본 인쇄물 세 종류가 있는데 동판은 소실됐고 목판 원본은 영부사 신전에 보관중이며 조상대대로 내려온 이 목판 소장품도 거의 비슷 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목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부적의 한 중앙에는 태상존상 조각상과 똑같은 인물이 그려져 있고, 주위에는 당초화(唐草花)와 묘견궁 기와에서 발견되는 구사(龜蛇) 그림이 매우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또 존상 위에는 우리나라 태극기에서 볼 수 있는 8괘 도형이 원형으로 배열돼 있는데, 원 안에는 북두칠성이 마치 태극기에서 빨강(양)과 파랑 (음)을 곡선으로 가르듯 배치돼 있었다.

어찌 보면 태극기의 옛날 모양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나 착각할 정도였다. 한민족의 상징으로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발견되는 북두칠성과 태극문양은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태상존상과 8괘 주위에는 중국 한나라 효문제(孝文帝)가 유진평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수받아 널리 퍼뜨려 나라를 평안케 했다고 전해지는 72도(七十二道)가 가지런히 배열돼 있었다. 한마디로 매우 진귀한 부적이었다. 나는 이 부적을 보면서 역사 추리를 해보았다.

「신상과 부적에 동시에 등장하는 태상(太上)신선 혹은 태상왕은 왕위를 다음 임금에게 물려준 임금을 지칭하는 말이다. 보통은 줄여서 태왕(太王) 또는 상왕(上王)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수로왕은 만년에 태자 거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방장산에 별궁을 지어 허왕후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이 별궁을 태왕궁이라 하고 스스로는 태상왕이 되었다.

후일에 세운 김수로왕릉의 신도비문에도 태왕원군(太王元君)이란 존호로 표기돼 있는데, 이 태상비법진택영부의 「태상」이란 글자와도 일치하고 있어 이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더욱이 부적 하단에는 이 부적의 출처로 대화국(大和國) 당시 타락산(陀洛山)이라고 한 점은 의미 심장하다. 이는 허왕후의 모국인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타」자와 수 로왕 가락국(駕洛國)의 「락」자에서 따온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 예로부터 부적 등에 쓰는 산의 명칭은 존재하는 산 이름이 아닌 어떤 상징이 되는 이름을 쓰는 것이 일반적 이기 때문이다(실제로 나는 대화(야마토)국 당시 옛날 고지도를 어렵게 구해 확인해보았는데도 타락산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존상 밑에 그려져 있는 구사도(龜蛇圖) 역시 예사롭지 않다. 이는 곧 가야의 상징인 거북이요, 수로왕의 딸로 추정되는 묘견공주 히미코가 야쓰시로에 당도할 때 타고 왔다는 전설의 구사와도 일치하지 않는가. 결국 이 모두가 가야문화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나는 시라기씨의 도움을 받아 목판영부의 유래가 적힌 연기집설(緣起集說)을 해독해보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태상비법진택영부의 신은 백제 성명왕의 제3왕자인 임성태자가 히고국(현 구마모토현)의 야쓰시로에 조정을 옮겨올 무렵 재앙을 막아주는 수호신으로 삼았으며, 압죽원진 (지명;현재 묘견궁 서측문 앞 공터) 진구지에도 진좌(鎭座)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후 740년 영부가 목판으로 제작되었고, 야쓰시로 진구지로부터 전국에 널리 퍼뜨리게 하였다.

그 수법(修法;수도하는 법)은 궁중에까지도 전해졌다고 기록됐다. 오랜 세월이 흘러 1361년 6월1일 어떻게 된 연고인지 야쓰시로 고한촌(古閑村)에서 금판 영부가 발견돼 진구지 신고(神庫)에 봉해져 세상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명치유신이 한창이던 1872년 신불(神佛) 분리의 위난으로 전통적인 진구지는 황폐해졌고 진택영부 수법 및 영부 반포도 끊어진 채 내려왔다.

상고(上古) 나라(奈良) 조정에 의해 대대로 궁중에 전해져 국가와 만민을 보호하고 재난을 없애며 복을 부르는 영부 수법의 전통적 신앙을 계승하여 부흥하고 신덕(神德)과 신의 도우심을 찬송하기 위해 1973년 진구지를 부활, 영부당(영부신사)을 재건 수호하였으며 72도의 진택영부존상을 다시 만들고 목판을 재판하여 독실하게 신앙하는 가정 에 널리 퍼뜨리게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신자들은 영부의 신앙수법을 행하고 제재초신(除災招神)을 함께 누리는 것을 염원하였다고 한다』

나는 사학자는 아니지만 이 내용이 역사학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최소한 영부에 그려져 있는 신이 백제 성명왕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받들어졌다는 점, 이미 그 당시 백제세력이 일본까지 진출했다는 점 그리고 영부 수법은 부적을 매개체로 한 일종의 신앙체계로 귀족사회까지 널리 퍼졌다는 점 등은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영부신앙은 바로 중국사서에 나오는 비미호(히미코)가 「귀도(鬼道)를 섬겼다」는 것과 일치하는 맥락이 아닌가. 부적의 소유주이자 향토사학자인 시라기씨는 부적 에 나오는 신존상이 묘견공주일 것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시라기씨가 내게 베풀어준 정성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집을 나섰다.

일본에 상륙한 가야의 무리들

나는 다음 여정으로 야쓰시로시를 흐르는 구마천(球磨川) 센가와교 바로 옆에 세워진 하동도래비(河童渡來碑)를 찾았다. 화강암에 새겨진 비문에는 『지금으로부터 1천수백 년전 3천여명의 하동(河童)이 이곳에 와서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축제를 베풀었다. 이 축제가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오레오레데--라이타』(オレオレテ--ライタ)이다」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이 비문을 읽어보면서 매우 흐뭇함을 느꼈다. 일본인들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오레오레데--라이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그러나 한국사람들 특히 영남지역 사람 들은 이것을 읽으면 금방 무슨 말인지 안다. 「오래 오래 되었다」라는 영남지방 사투리이기 때문이다.

또 일본인들은 「하동」에 대해서도 억지 해석을 덧붙이고 있었다. 중국 구천방(九千坊)의 하동 집단이 양자강 하구로부터 황해로 나와 일본까지 헤엄쳐 와 결국 구마모토현 야쓰시로에 상륙했다는 것. 또 하동의 조각상도 만들어 놓았는데 얼굴은 원숭이 얼굴에 코와 입은 돼지처럼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하동이 중국에서 일본까지 헤엄쳐왔다는 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는 오리발처럼 물갈퀴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하동」은 원래 「가라(가야)에서 온 무리」를 뜻하는 말이다. 하동을 일본어로는 「갓파(かっぱ」라고 하고 야쓰시로 주민들은 옛날부터 「가라파」라고 불러왔다. 다시 말해 하동의 원말은 「가라배(加羅輩)」라는 뜻이다. 또 야쓰시로시와 얼마 멀지 않은 북규슈 동서부지역 일대는 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가라」라고 불렸다. 결국 하 동도래비는 「가야인들이 이곳에 온 지 오래오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이 벌였던 축제는 수천 명의 가야 도래인과 함께 야쓰시로에 나타난 묘견공주 히미코가 구마천변에서 매년 그들의 도래기념축제를 벌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일본에 있는 한국의 문화유적을 살펴보면서 일본인들이 얼마나 한국혼이 깃들인 문화유적을 인멸하고 또 왜곡시키려하는지를 무수히 보았다. 하동도래비 역시 이같은 시각에서 비롯된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이라고밖에 달리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장난을 한가지 더 들어보자. 나는 예전에 가고시마현의 도미구마(富隅)성 근처에서 묘견공주를 모시는 히미코신사(卑彌呼神社)를 보고 기억해둔 적이 있다. 그러다 몇 해가 지나 다시 그곳을 찾아가보니 어느새 히미코신사라는 간판은 사라져버리고 전혀 그 뜻을 알 수 없는 「히루코신사(蛭兒神社)」라고 변조돼 있었다. 일본인들은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한국과 관계가 있는 유적은 교묘하게 인멸하거나 왜곡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인들은 도래계 한국인들이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 신사를 대상으로 이같은 인멸작업을 자행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거부감 때문일 것이다. 내가 특히 한국과 관련된 신사를 자주 찾아다니는 것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하고 있는 신사 왜곡을 막고 우리문화의 숨결을 지키기 위해서다.

나는 유유히 흐르는 구마천을 바라보면서 묘견공주 히미코가 전설의 「구사」, 즉 거북을 타고 왔다는 것이 거북모양을 본떠 만든 배를 타고 오지 않았나 상상해본다. 이는 수로왕이 강림한 김해시 구산동의 구지봉(龜旨峯) 전설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대목이다.

실제 일제는 우리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을 때인 1915년 치안을 이유로 조선총독부 극비지령인 「경무령」을 발동해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족보 발행을 금지했었 다. 지난 91년 한일협력교류기금 모금을 위한 제18회 한일문화강좌에 참석한 재일 사학자 박병식씨는 강연에서 『이 조치는 히미코가 다스린 야마대국의 정체는 물론 김수로왕 왕족들이 고대일본의 왕가를 이루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탄로날 것이 두려워 취한 조치』라고 밝힌 바 있다.

소시모리에 얽힌 역사의 향기

나는 하동도래비를 둘러보고 다음날 가고시마현 아이라군 묘견 온천마을 산중턱에 있는 웅습(熊襲)굴, 즉 「구마소」를 둘러보았다. 관광지라서 그런지 평일인데도 관광객들이 제법 보였다. 그 옛날 원주족들과 가야 도래인들의 다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나는 30여평 크기의 동굴 속을 거니는 동안 문득 보통학교 시절 나의 은사를 머리에 떠올렸다.

「웅습」이라는 말은 일본어로 「곰의 습격」을 뜻하는데, 이는 9척 장신에 힘이 센 한반도 도래인을 곰에 비유하는 의미가 있다고 스승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일본의 핵심각료이자 스승의 작은 아버지가 『일본의 초대 진무(神武)왕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구마소」였다』라고 말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말하자면 「웅습」의 일본 발음인 구마소는 가야에서 온 도래인이라는 뜻인 것이다.

사실 내가 한일고대 역사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나의 은사 덕분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왜정 치하에서 보통학교를 다닐 무렵 닷다 기요토(立田淸人)라는 마흔이 넘은 독신 교사가 있었는데, 나는 그 은사를 무척 따랐고 스승도 나에게 무척 깊은 애정을 쏟아주었다. 어느날 은사는 『너희들 말 안들으면 어머니의 나라 소시모리(曾戶茂梨)로 보내버릴거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린 나로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성장하면서 두고두고 뇌리에 남아 있었고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주경야독하고 있을 무렵이다. 동네 아이들이 장난을 치면서 노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아이들이 닷다 스승이 들려주었던 소시모리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의 나라 소시모리…」, 과연 어머니의 나라가 어디란 말인가. 이 의문은 결국 수십년이 지난 후 닷다 스승을 다 시 만나서야 풀렸다.

일본이 벌이고 있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이미 반백이 넘은 은사 부부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고, 또 당시 일본의 핵심관료이던 은사의 작은아버지까지 소개해주었다. 가족들과 내가 합석한 가운데 두 분은 고대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보통학교 5학년 때 들었던 소시모리의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나라 소시모리란 바로 한반도를 지칭하며, 소시모리는 소머리(牛頭峯)의 일본식 발음(취음)이며, 예로부터 일본사회에서는 속담처럼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도 했다. 당시 닷다선생은 소시모리를 강진(필자의 고향)의 소머리봉(우두봉)에 비유해 「말 안들으면 너희 고향에 보내버린다」고 재미있게 표현하신 것이다.

실제로 소머리봉은 한반도내에 강진의 우두봉을 비롯해 옛날 가야강역이었던 고령의 가야산(옛날 명칭은 소머리봉), 춘천의 우두산 등 여러 곳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말하 는 소시모리가 고령의 가야산이라는 견해와 춘천의 우두산이라는 견해도 있어서 지금까지 분명치 않았다. 그러다가 나는 얼마 전 춘천의 우두산에 일제시대 때 조그마한 신사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며칠 후 그곳을 현지답사했다.

호반의 도시 춘천은 과연 경관이 수려하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해 신(神)의 정기가 서릴 만한 곳이었다. 옛날 소시모리라 칭했던 우두산(牛頭山)은 시가지의 변두리 마을 「우 두동」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나는 우두산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틀림없이 소대가리를 닮은 데다가 바로 옆으로 휘돌아 흐르는 소양강이 일본 센다이(川內)시의 카미카메야마(神龜山)와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카미카메야마는 김수 로왕의 후손이자 일본 신대(神代)의 왕으로 추앙받아온 니니기노미코토(爾邇藝命)의 능묘가 있는 신체산(神體山)이다. 그 크기나 모양, 옆으로 흐르는 강 등이 너무나 흡사 했는데 일제시대에는 이곳 우두산 정상에 스사노오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있었다고 현지 주민은 증언했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우두산이 「한반도의 소시모리」에서 외면당했던 주된 이유는 「춘천은 가야의 강역이 아니다」라는 일반적인 관념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관념은 잘못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되었다. 우두산 인근 소양강변에서 가야의 땅이었음을 증명해주는 마을 「가라목(加羅頂)」을 발견했던 것이다.

예부터 마을 명칭으로 이렇게 불려 오는 이 마을은 향토사 자료에서 확인해본 바 가라목 또는 가래울로 표기되어 있었으며 한자로는 가야의 정상이라는 뜻인 「加羅頂」으로 나타나 있었다. 매우 중대한 발견을 한 듯 흥분을 감출 길 없었다.

이같은 사실을 한반도가 일제에 의해 강점당하고 있던 1936년 9월에 발행된 한국지리 풍속지 총서 54권인 춘천풍토기(春川風土記), 강원도 도세 요람에서도 최종확인되었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소시모리는 6가야의 북단 강역이었던 춘천의 우두산을 지칭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나는 은사 덕분에 일본의 고대문화 유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후 사업이 바쁜 중에도 일본에 들를 때에는 꼭 우리 조상의 얼이 담긴 문화유적을 답사하곤 했다. 특히 규슈지방의 가야유적 답사에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은 가야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건국의 뿌리가 되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인구이동으로도 확인해볼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이 정립하고 가야가 건국할 1세기에 일본열도는 「야요이(彌生)」 시대였다. 야요는 갓난아이가 탄생했다는 뜻의 미개시대를 말하는데, 이 당시 규슈인구는 6천여명에 불과했고, 일본 전역을 통틀어도 원주족으로 26만여명의 아이누족만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규슈 인구가 3세기에는 급작스레 60여만명을 넘어섰다. 불과 2백년 사이에 인구가 1백배가 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구 증가로 보기에는 불가능하다. 정상적인 인구증가는 1대를 20년으로 칠 때 자연감소분을 전혀 계산하지 않더라도 약 5만명 수준이 고작이다. 결국 60여만명이라는 인구는 외부에서 유입한 경우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당시 한반도는 어떠했을까. 고구려,백제, 신라와 호각지세였던 한반도의 가야는 왕성한 철기문화로 국력을 신장해나갔지만 김수로왕 사후 국세가 급격히 쇠락해 탈출구를 모색하게 된다. 가야가 일찍부터 발달한 해상무역의 이점을 이용해 거리가 가장 가까운 규슈로 진출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 즉 백제와 신라의 협공이 계속되는 가운데 가야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명맥만 유지한 채 6가야 연맹의 주류는 규슈로 진출했으며, 그 정점에는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일본건국신화의 주인공들

이런 점에서 김수로왕의 후손들 중 7왕자는 무척 신비에 싸여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7왕자들은 외삼촌을 따라 산속에 들어간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7왕자는 앞에서 살펴본 묘견공주 히미코처럼 수로왕의 자손들이다. 그런데 그 7왕자의 흔적이 바로 규슈일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또 7왕자 유적이 발견되는 곳에서는 으레 묘견공주를 기념하는 유적 및 신사가 있어 이들 형제가 매우 가까운 곳에서 활약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묘견공주가 선견왕자와 함께 일본으로 도항한 이후 나머지 왕자들도 후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인 아라타 에이세이(荒田營誠)도 구름을 타고 떠났다(乘雲離去)는 7왕자가 현해탄을 건너 일본 규슈에 도착, 일본 신대(神代)의 건국 주역이 되었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논문 때문에 그는 우익분자들의 테러 협박을 받고는 지금도 숨어지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이 말하는 신대, 즉 「신의 시대」에 활동했던 무대로 가보자. 규슈 남쪽 미야자키(宮崎)현에 자리잡은 쿠지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龜旨峯, 또는 다카치호미네, 1574m) 와 바로 인근의 가라쿠니다케(韓國岳, 1700m)는 이름만 들어도 우리나라와 직접적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산이다. 쿠지후루다케는 김수로왕의 강림장소인 경남 김해의 구지촌봉(龜旨村峯)과 똑같은 말이고, 가라쿠니다케의 가라쿠니는 「가락국」의 일본어 발음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들은 한국악의 「한」(가라;から) 자가 마음에 걸렸는지 명치유신 때 같은 발음이 나는 「공(空)」(역시 발음은 가라)자를 써 「空國岳」으로 개명하려 했으나, 지방 주민들의 강한 반발과 외면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두 산을 배경으로 「천손강림(天孫降臨)」신화, 즉 일본건국의 시조 신화를 등장시키고 있다. 『고사기』에는 일본의 초대왕인 진무(神武)천왕의 증조부이자 가야국 7왕자의 화신(化神)으로 표현되는 니니기노미코토가 쿠지후루다케에 강림하여 제전의식을 올린 후 인근 가라쿠니다 케로 올라가 북쪽의 한반도를 바라보며 『여기는 좋은 곳이다. 왜냐하면 가라쿠니(가야; 한국)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조칙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니니기노미코토의 조국이 가라쿠니, 즉 가락국임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일본 동경대 명예교수이자 동대학 오리엔트 박물관장인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지난 91년 김해 대성동의 가야고분 유물 등을 확인하고 귀국한 뒤 월간 「아사히」를 통해 『김해 구지봉에서 시작되는 가야의 건국신화와 구지봉과 동일한 의미의 규슈 쿠지후루다케의 일본 건국신화에서 도저히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치된 점을 일찍이 발견했던 미시나 아키히데씨의 설에 동의한다』는 요지로 장문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기고문에서 지명뿐 아니라 가야의 김수로왕은 붉은 보자기(紅布)에 싸여 내려왔는데, 일본은 「마코토오후스마」라는 이불 비슷한 보자기에 쌓여 내려왔다는 등 두 나라의 건국신화가 강림장소와 방법, 도구에서 어떻게 이렇게 일치할 수 있는가 하고 놀라워했다.

그는 더 나아가 가야인들의 규슈 이주와 니니기노미코토의 등장, 그의 증손자인 진무(神武)가 규슈에서 동정(東征)을 시작하여 야마토(大和)를 평정한 뒤 일본의 초대 왕이 되었다고 발표함으로써 일본 사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에가미교수의 글에 대해 아직까지 일본내에서 어떠한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는 가야신화의 주인공이 일본건국신화의 주인공이라는 주장이 고고학적 유물의 발견에 힘입어 신빙성을 더하고 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없어진 7왕자를 만나다

가야의 7왕자를 대표하는 니니기노미코토 일행은 이후 이 산을 중심으로 남쪽 가고시마(鹿兒島)현 일대에 살고 있던 선주족들을 서서히 동화 흡수하여 세력을 넓혀갔다. 니니기노미코토 일행이 최초로 궁궐을 짓고 후손들을 낳아 길렀던 궁터를 찾아보기로 했다.

가고시마현 남서부의 가세다(加世田)시에서 바닷가 쪽(서쪽)으로 6km쯤 가다 보면 길가에 「일본 발상의 땅」이라고 쓴 높이 1m 정도의 대리석 표석이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1백m쯤 떨어진 산 언저리에 바로 가사사 궁궐터가 있다.

이곳에서 만난 80대의 촌로(村老)도 이 궁궐터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2천년전에 쌓은 석축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궁궐터를 기념하는 비석 옆에는 마치 보 트처럼 생긴, 안쪽이 파인 두 개의 주춧돌이 천년의 고독을 음미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을 소개하는 석조 비문을 읽어보았다.

『천손 니니기노미코토가 다카치호미네(쿠지후루다케)에 내려와서 코노하나사쿠야히메를 아내로 맞아 황실의 거처로 정한 곳이다. 화조명, 화수세리, 히코호테미노미코토 세 왕자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이곳 옛 선조들의 유적을 마음속에 기리고 새기는 뜻으로 신화 일본발상의 땅에 이 비석을 건립한다』

이처럼 니니기노미코토의 궁궐터를 일본 발상의 땅이라 하여 일본인들이 그 의미를 크게 부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대의 존재가치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알 수 있다.

한편 가고시마 일대에서는 일곱 왕자를 지칭하는 7자가 들어가는 유적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7왕자의 맏형인 니니기노미코토를 제신으로 모시는 기리시마신궁 인근에서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나나야시로신사(七社神社)를 발견했다. 이 신사의 주인공이 가야의 7왕자라는 것은 신사 입구에 놓인 거북돌(龜石)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일본의 신사 혹은 유적지에서 거북돌이 놓여 있으면 「아, 이곳은 가야의 조상들을 모시는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또 아이라군 일대에는 7왕자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7개의 성터가 있었다. 나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돼 있는 도미구마성(富隅城)을 올라가보았다. 성 북쪽 으로 바라보면 멀리 총사령부에 해당하는 구마소성(熊襲城)이 있고(고쿠부시 성산공원 바로 아래에 있는데 현재 흔적만 조금 남아 있다), 성 앞으로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바다가 보였다.

이곳 토박이인 택시기사는 옛날에는 도미구마성 바로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지금은 바다를 메워 간척을 해놓았는데 아마도 7왕자들은 각기 성을 하나씩 맡아 외세의 침략을 방어했을 것이다.

한편 쿠지후루다케(龜旨峯)에서 발원하여 고쿠부(國分) 들녘을 흐르는 아모리가와(天降川;하늘에서 흐르는 강) 하구에는 7왕자들이 항구로 삼았다고 전하는 나나미나토( 七港)가 있으며 가고시마현과 인접한 구마모토에도 7왕자들이 축성했다고 전해지는 시치죠(七城)가 현존하고 있음도 확인했다.

일본의 양식 있는 학자들, 특히 아라타 에이세이씨는 『니니기노미코토가 신(神) 1대이며, 신 2대는 그의 아들인 히코호데미노미코토이며 3대는 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코 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이들 신이 모두 7왕자들을 지칭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것은 수십년간 일본 유적들을 살펴본 나의 판단이기도 하다.

현재 신 1대인 니니기의 능묘는 가고시마현 서북쪽 센타이(川內)시 들녘에 자리잡고 있는 카미카메야마(神龜山) 정상의 에노산릉이다. 그런데 이 산릉은 신기하게도 김해의 구지봉과 춘천의 우두산과 크기나 모양, 환경 조건이 너무 흡사하다는 것을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니니기는 옛 조상의 나라를 잊지 못해 자신의 무덤자리로 조국과 빼닮은 산을 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념에 잠겨보기도 했다.

신 2대인 히코호데미노미코토의 다카야산릉은 쿠지후루다케 남쪽 자락에, 그리고 신 3대 우가야 산릉은 가고시마 동쪽 오스미반도의 중심부인 우토야마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이 세 곳의 산릉은 그 절경이 가위 천하제일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런데 신 2대가 있는 다카야 산릉은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몇해 전 이 산릉을 발굴하려던 일본 궁내청에서는 갑자기 작업을 중단하고 흙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궁내청의 공식 발표는 「신대 천황의 존엄성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가야의 유물이 대량 매장돼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규슈지방에서 마지막으로 단군신앙과 관련된 신사를 가보기로 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환웅과 단군을 모시고 있다는 환단신사(桓檀神社)를 찾아내는 데는 적지않이 애를 먹었다. 환단신사가 가고시마현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곳저곳 수소문해 보았으나 신사목록에 등재돼 있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민족의 건국시조를 모시는 곳이라 그런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구시키노(串木野)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미야마(美山) 마을 심수관씨의 「수관 도원」(조선에서 끌려간 조선도공 심당길의 후예가 사는 도원)에 들른 길에 60대 촌로로부터 환단신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신사 부근에 산마우다케(三舞岳)라는 자연석 바위가 있는데 단군의 후손들인 한국계들이 그 바위 위에 올라가 눈물을 흘리며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얘기를 은 적이 있 다고 했다. 나는 곧바로 찾아나섰다. 한적한 농로와 시골마을을 지나 1km쯤 가다보니 무척 넓은 차밭이 나타났고 차밭 건너편에 「옥산(玉山)신사」라고 쓰인 간판이 있었다. 여기가 바로 환단신사였다.

그러나 찾았다는 흐뭇함도 잠시, 허술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에 착잡한 마음이 이를 데 없었다. 신사를 관리하는 사무소는 물론 참배객 한 사람도 없는, 그야말로 버려진 곳이었다. 신사 본전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퇴색해 목판화가 먼지에 싸인 채 나뒹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환웅과 웅녀를 그린 듯한 천상계(天上界) 그림이었다. 가에이(嘉永)라고 쓰인 연호가 희미하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명치유신 이전에 만들어진 것 같았으나 언제부터 버려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신사 처마의 곧은 선과 지붕 꼭대기의 골기와는 한국과 동일한 건축양식이었고 사각으로 깎아 세운 기둥과 서까래 그리고 창틀 모두가 소나무로 돼 있었다. 경내도 일본식이라기보다는 한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과거에는 이 신사도 환단신궁(桓檀神宮)이라는 이름으로 사격(社格)이 높았으나 명치유신 때 현재의 이름으로 격하되 었다. 신전에는 조선시대에 쓴 순 한글소설인 『숙향전』이 단군위패와 함께 모셔져 있었다고 하나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어 볼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단군신앙의 또 다른 메카로는 히코산신궁(英彦山神宮)이 있다. 이 신사는 북규슈지방 후쿠오카(福岡)현과 오이타(大分)현 경계에 위치한 히코산(1200m)에 자리잡고 있다. 이 신궁에 모셔진 제신이 바로 우리 건국시조인 단군과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다. 또 히코산신궁 봉폐전 남쪽에 위치한 다마야신사, 일명 수험굴(修驗窟)에는 어깨를 덮을 만큼 긴 머리칼과 수염 그리고 도복을 차려입고 근엄하게 앉아 있는 환웅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누가 보더라도 첫눈에 환웅의 수험도(일명 天驗道)임을 알 수 있어 한국방 문객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한편 히코산 정상의 삼봉(三峯;북악, 중악, 남악) 중에서 가운데에 있는 중악의 정상에는 한반도를 향해 북향으로 안치해놓은 상궁(上宮)이 있는데, 일본 초대천황인 진무가 동정을 할 때 제사지냈다는 전설에 따라 서기 740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히코산신궁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벳푸대 나카노반노(中野幡能)교수는 『이 신앙은 분명히 한국의 단군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 삼악의 신령들은 한국의 백두산 신, 즉 환인과 환웅과 단군의 삼신』이라고 주장해 일본 사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도 있다. 이 환웅의 수험도가 전성기 때인 6세기에는 수도하는 수험도사(修驗道士)가 무려 규슈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40여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신앙에 대한 숭앙심과 우리 민족의 규모가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오늘날에도 이 지방 주민들은 수험도를 신봉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처럼 마늘을 간장에 절인 마늘장아찌를 먹거나 선물로 주는 풍습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는 환웅이 마늘을 먹고 21일간 수도한 끝에 사람으로 인정받은 웅녀(熊女)신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규슈에 있는 한국과 관련된 유적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히코산신궁도 오래 전부터 일본의 황국사관 정립정책에 의해 수난과 박해를 받아왔다. 19세기 초 명치정부는 수험도 금지령을 내린 후 히코산신궁은 물론 히코산 자체를 폐쇄하는 극악한 탄압을 강행했다. 그런 까닭인지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한반도 도래인의 후손들조차도 환웅이나 단군의 역사적 존재를 모르고 있다. 환웅영정을 선정상인(善正上人;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위에 있다)이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름으로 붙여놓고 있을 뿐이었다.

조선조 임진왜란 때 붙잡혀온 조선 도공의 후예인 제15대 심수관씨는 『규슈에서 다다미방을 빼고는 모두가 한국인 것』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어 털어놓는다. 실제로 그렇다. 고대 규슈는 가야의 분국이나 다름없었으며, 일본 신대(神代)와 진무천황 이후의 인대(人代)의 초기 왕들 역시 가야의 후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이룩한 문화와 역사는 고대한국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호에는 야마토 평원과 백제진출 유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세계 최고(最古)여서 「세계보물 1호」로 지정된 법륭사, 역시 세계 최대(最大)를 자랑하는 동대사의 비로자나불상, 그리고 최고(最高)의 아름다움과 품격을 갖춘 백제관음상… 이들 모두 한반도 백제인들의 작품이었다. 한국에서 사라진 백제문화를 보고 싶으면 지금 당장 일본 나라현으로 가보라.》

80여 평생을 기업에만 몸담아온 내가 일본열도에 흐르고 있는 우리 민족의 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인 1930년경부터였다.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주경야독하고 있던 어느날. 모처럼 휴일을 틈타 나라(奈良)의 어느 사찰에 들렀는데, 60대의 일본 노인이 나를 보더니 조선에서 온 소년임을 금방 알아차리고 「나라」라는 지명의 유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엉뚱한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를 보면서 그 노인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망하자(서기 660년) 귀족을 포함한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대거 망명,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잃어버린 나라를 기필코 되찾자」는 각오로 부르게 된 것이 바로 「나라」라는 지명의 유래다. 오늘날 한자로 「奈良」라고 쓰는 것은 취음을 위한 차자(借字)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라 지방에는 백제인들이 남겨놓은 훌륭한 문화 유물이 곳곳에 산재한다』

나는 그후 그 노인의 얘기를 가끔씩 되새기며 틈이 날 때마다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이루어놓은 찬란한 문화유적 답사를 즐겼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정부가 수립된 후 제4대 국회에 진출하여 의정 활동을 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나는 줄곧 기업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우수한 문화를 이어받아 경제대국이 된 일본과 우리나라가 동반자적 경쟁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두 나라의 올바른 역사 인식과 상호 이해를 통해 양국의 우호 증진에도 기여하자는 취지에서였다.

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여 지난 95년에는 일본 열도에 흩어져 있는 우리 조상들의 문화유적 탐사자료들을 엮어 『일본은 한국이더라』(문학수첩사)라는 책자로 출간,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나는 「신동아」 4월호에서 가야 김수로왕 후손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초대왕인 진무(神武)천황이 되었다는 아라타 에이세이(荒田英誠)씨 등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다루었고 규슈 일대에 산재한 7왕자 유적과 묘견공주 유적을 통해서 가야가 일본 건국의 주체였음을 고찰해 보았다.

특히 이와 관련해 일본의 권위 있는 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교수의 최근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 최고 명문대인 동경대학교 명예교수이자 동 대학의 오리엔트박물관 관장으로서 수십년간 이 분야 연구에만 몸바쳐온 그는 동아시아사학회장(東亞細亞史學會長)의 신분으로 지난 95년 10월26일 동아일보사 초청으로 내한, 「한일관계의 고대 사」란 주제로 강연회를 가진 바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일본 기원은 고대 한민족」이었음을 재차 강조, 일본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을 뒤엎는 발언을 함으로써 일본 사학 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가야신화 베낀 일본 건국신화

그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전하는 일본 건국의 주인공인 니니기노미코토의 강림과 『삼국유사』가 전하는 수로왕의 강림을 비교해본 결과 강림 방법이나 장소(지 명), 도구가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니니기노미코토가 다카치호(高千穗)의 쿠지후루타케(龜旨峯)에 강림했을 때 『여기는 좋은 곳이다. 왜냐하면 가라쿠니(駕洛國)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조칙(詔勅)을 남겼다는 사실도 니니기가 가야 출신이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반론(反論)이나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일본 학자는 아무도 없다.

에가미교수는 또 니니기노미코토의 증손(曾孫)인 진무(神武)가 규슈 휴가(日向)에서 동정(東征)에 나서 세토내해(瀨戶內海)를 거슬러 올라가 일본열도의 심장부인 오사카( 大阪), 교토(京都), 나라(奈良)지방인 긴키(近畿) 평야를 정벌하고 일본 천황가의 제1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신빙성 있는 고고학적(考古學的) 물증으로 입증하였다. 일본 사학계가 에가미교수의 주장에 대해 함구불언(緘口不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고고학적 물증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야가 일본 건국의 주체였다면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일본문화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삼국중에서도 특히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백제 인들의 숨결은 1천5백여년이라는 장구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도 퇴색하지 않고 오늘날 야마토(大和) 평원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백제가 일본과 국교를 맺은 것이 4세기 후엽인데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이 일본에 건너가 『천자문』과 『논어』를 가르쳤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서기 404년에 아직기는 오오진(應神) 천황이 태자로 있을 당시 그의 스승이 되었으며, 405년에는 아직기의 천거로 왕인이 『천자문』 한 권과 『논어』 열 권을 가지고 와 오오진 천황의 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결국 백제가 낳은 아직기와 왕인박사는 일본 황실의 스승 역할을 했고 찬란한 아스카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셈이다.

영원한 문화민족 구다라(百濟)

1985년 12월29일 나라현 아스카촌(明日香村)에서 대량으로 발굴된 목간(木簡)에 백제인 아직기의 후손에 관한 기록이 담겨져 있음은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책인 『고사기』에는 왕인의 이름이 와니키시(和邇吉師)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와니(ワニ)라고 기록돼 있는데 그의 훌륭한 면면이 잘 소개돼 있다. 도쿄 우에노공원(上野公園)에는 왕인박사를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어 관람객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나는 백제유적 탐사 첫번째로 왕인박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오사카와 교토의 중간 지점인 히라가타(枚方)에는 왕인공원과 왕인묘가 있다. 이곳은 1731년 묘소가 고 증돼 묘역이 조성되었으며 1938년에는 오사카부(大阪府) 사적으로 지정돼 정결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입구 안내문에는 정중한 경고문이 부착돼 있었다. 「강아지나 개를 데리고 이 묘역에 들어오지 말 것이며, 슬리퍼를 신고 들어오거나 고성방가도 삼갈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든 일본인들에게 문자와 학문을 깨우쳐준 백제인 스승을 존경 하는 뜻이 담겨 있는 안내문이었다.

또 묘 옆에는 흰색 칠을 한 4각 각목에 「잘 오섰어요 백제 왕인박사 묘에」라고 철자법은 다소 틀렸지만 또렷하게 한글로 써놓은 표지판도 세워져 있었다. 1천6백여년 전 백 제에서 건너간 학자가 일본인의 영원한 스승으로 그들 마음속에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나는 이번 탐사에서 왕인을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우연히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왕인신사」가 있다는 기록은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왕이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돼 있는 나라현 덴리시(天理市)의 이소토카미신궁(石上神宮)을 가려고 복잡한 골목길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골목 안쪽에 아담한 도리이(鳥居)가 눈에 들어와 차를 세우게 하고 신사 곁으로 다가갔다. 나라에 있는 신사라면 십중팔구는 백제와 연관 있는 신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신사 정원에 세워 놓은 안내판을 보니 와니시타신사(和爾下神社)였다. 틀림없는 왕인(王仁)의 신사였다. 그들은 『고사기』에 왕인을 와니(和爾), 그리고 『일본서기』에 와니(ワニ)라고 표기해 놓고 있지 않은가. 내용을 살펴보니 고대 야마토(大和) 정권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와니씨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에 이 신사를 건립했다고 적혀 있었 다. 그렇다면 이곳이 왕인박사의 거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 신사가 있는 덴리시도 나라현에 속한 도시이며, 나라현은 야마토국의 수도이자 중심지로서 왕인이 활약 했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신사 배전 앞뜰에 두 마리 소(牛)가 마주 보고 있는 석상이 안치돼 있었다. 소는 예로부터 우리 한국의 대표적인 상징 동물이다. 일본의 건국신화에 등장 하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와 그의 남동생 스사노(須佐之男)의 신화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나라 소시모리(牛頭峰)」의 소머리봉(牛頭峰)도 한반도를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와니시타신사를 나와 인근에 있는 이소노카미신궁을 찾았으나 백제왕이 하사했다는 칠지도는 보지 못했다. 이유는 궁내청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칠지도는 한일 양국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신비의 칼이다. 명문(銘文)에 새겨진 「供(공)」자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이 供자가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본 학자들은 백제왕이 일본천황에게 「헌상했다」는 의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뜻 있는 일부 일본학자들간에도 이에 대한 논쟁이 가끔 벌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 학자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칠지도를 보고 싶다는 말에 난색을 표하는 사무소 직원을 뒤로 하고 히라 가타의 백제왕신사를 찾았다.

왕인묘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백제왕신사는 백제사적(百濟寺跡) 뒤편에 세워져 있다. 1970년대에 이 지방 유지들이 찬란했던 옛 조국 백제를 그리워하여 성금을 모아 이처럼 훌륭한 신사를 건립한 것이다. 한편 백제사적은 드문드문 축대만 보여 이곳이 절터였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듯했으나 현재 나라현의 가스카와카미야신사(春日若宮神社)의 경내에 세워져 있는 백제사와 비슷하지 않았나 추측됐다.

나라의 백제사는 원래는 9중탑이었으나 지진으로 소실돼버려 다시 지으면서 현재의 3중탑으로 축소 재건했다고 기록돼 있었는데, 히라가타의 백제사는 탑마저 사라진 채 축대만 남아 있고 아기자기하게 심어놓은 소나무들만이 나그네의 울적한 심사를 달래줄 뿐이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해 발길을 다시 나라의 아스카로 돌렸다.

아스카(明日香)의 유래

일본 최초의 수도 나라, 이곳에 꽃핀 찬란한 아스카문화는 옛 백제인들의 한과 혼을 곳곳에 간직한 채 천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밤하늘의 별처럼 아스카에서 찬연히 빛나 고 있다.

전란(戰亂)을 피해 이곳에 도래한 백제인들이 「아주 편안한 안식처」라고 하여 이름붙인 「安宿(안숙)」이 오늘의 아스카(明日香)가 되었다. 또 그들이 바다를 건너 새처럼 날아와 이곳에 뿌리내린 문화라고 하여 이름붙은 아스카문화(飛鳥文化)는 일본 문화 그 자체이자 전부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한반도에서 건너간 불교문화가 이곳에서 화려하게 개화했던 것이다.

아스카촌 서쪽에 있는 작은 언덕 아마카시노카에서 고도(古都) 아스카를 바라보면 그 문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인들이 건립한 일본 최초의 절 아스카사(飛鳥寺)와 아스 카대불(飛鳥大佛), 신비에 싸인 거북돌 가메이시(龜石), 경주 포석정과 흡사한 주선석(酒船石) 사카부네이시, 그리고 피장자가 백제계의 소가노마코(蘇我馬子)라고 알려진 석무대(石舞台) 고분이 있는가 하면 다카마쓰(高松)총 고분, 문무(文武)천황릉, 덴무(天武)와 지토(持統)천황의 합장릉도 눈에 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해는 서기 538년, 백제 제26대 성명왕 때다. 불타의 가르침과 불상 등이 일본에 전파됐는데 일본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숭불파인 소가노마코와 받아들이지 말자는 배불파인 모모노베노모리야(物部守屋)가 거의 반세기에 걸쳐 격렬하게 싸운 끝에 결국 587년 소가노마코가 승리함으로써 찬란한 불교문화가 꽃을 피우 게 되었다. 아스카사(혹은 법흥사)는 이때 지어진 일본 최초의 사찰로 불교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원점이자 요람이기도 하다.

아스카사는 소가노마코의 발원으로 건립되기 시작, 9년 만인 596년에 준공되었다. 이 절을 건립하기 위해 백제에서 혜총을 비롯 여러 명의 승려와 사찰 전문 기술자가 파견 되었으며 고구려의 설계기술이 도입되기도 했다. 이 절의 완성으로 아스카에 수도가 세워지면서 아스카문화가 시작됐던 것이다.

그러나 아스카사는 1천4백여년이 흘러오는 동안 당초의 건물은 소실되고 전원과 민가(民家)로 변해버렸다. 그러다 발굴조사단의 노력으로 사찰규모가 탑을 중심으로 동, 서 , 북쪽에 3개의 금당이 배치된 일본 최고의 가람이었으며,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리고 그 외측에는 강당이 있는 장대한 사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아스카사에 안치된 본존 아스카대불은 일본 최초의 석가여래상으로 사찰이 완성된 지 10여년 후인 609년에 완성되었다. 당시 스이코(推古)천황이 성덕태자(聖德太子), 소가노마코 대신들과 함께 서약을 맺어 백제 도래인인 시바타토(司馬達等)의 손자 구라즈쿠리(鞍作)라는 불사(佛師)에게 명하여 만든 일본 최고의 불상이다. 당초에는 금동 불상으로 양측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거느린 석가삼존이었는데 12세기 후반 대화재로 전신에 상처를 입었고 그후 보수를 받아 오늘날까지 내려왔다.

이처럼 일본 불교문화의 원점이 된 아스카사는 옛 백제국에 대해 후의와 감사한 마음을 표하기 위해 한국의 수덕사와 교류를 갖고 있다. 현재 절의 규모는 창건 당시에 비해 폐허에 가까울 정도로 보잘것없지만 처음 백제의 혜총법사와 고구려 혜자법사가 주도하여 이 절을 만들었다는 데 우리 민족의 자부와 긍지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혜총과 혜자법사는 그후 수년 동안 아스카사에 머물면서 성덕태자를 불교에 귀의케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반도 문화의 보고(寶庫)

아스카촌은 그야말로 한반도 문화의 보고, 그중에서도 특히 백제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아스카촌 어느 곳이라도 발길이 닿는 곳이면 으레 한반도와 연관이 있는 문화유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스카촌 주변도로를 걷다 보면 백제계 실력자로서 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소가노마코의 능묘로 추정되는 석무대(石舞台) 고분을 만날 수 있다. 거석 을 쌓아올린 엄청난 규모의 석실은 아스카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꼽힌다. 횡혈식 상원하방분인 이 고분은 돌 무게만도 2천3백여t에 달하는데 국립특별사적으로 관리하고 있을 만큼 중요시되고 있는 문화유적이다.

그 옛날에 이렇게나 거대한 바위를 어떻게 옮기고 또 축조했는지 상상이 가지 않을 만큼 웅장한 규모의 석무대 고분은 발견 당시 부장품이 모두 도굴된 상태여서 피장자에 대한 정설은 없다. 다만 막강한 실력자가 아니면 이처럼 거대한 고분 축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소가노마코일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일 뿐이다.

또 마을입구 쪽 민가 뒤편에는 거북 혹은 개구리를 닮은 거대한 화강암석이 역시 장구한 세월 동안 아무 말 없이 한곳에 쪼그린 채 앉아 있다. 거북은 가야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동물인데 야마토(大和)를 평정하였던 인물이 김수로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초대 진무(神武)천황이라는 사실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추측되지만 안내문에도 자세한 설명은 보 이지 않는다.

다만 사방의 경계를 알리는 표주(標柱)가 아닐까 추측된다고 적혀 있지만, 표주로 보기에는 바위가 지나치게 크고 또 생긴 모양이 거북을 닮은 것이 심상찮은 역사의 산물임 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곳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한반도와 무관하지 않은 내용이 담겨 있다.

『아득한 옛날 야마토국(大和國)이 호수였을 때 호수를 사이에 두고 다이마(當麻)와 가와라(川原)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다이마는 뱀을, 가와라는 메기를 앞세워 수년간 싸움을 해왔지만 결판이 안 나다가 결국은 메기가 패했다. 그래서 가와라는 살고 있는 쪽의 호수물을 모두 다이마 쪽으로 빼앗겨버렸다.

가와라의 호수물이 말라버리자 그곳에 살고 있던 수많은 거북들이 모두 죽어버렸다. 몇 년이 지난 후 거북을 불쌍히 여겼던 마을 사람들이 커다란 돌에다 거북 모양을 새겨 이곳에 놓았다. 지금은 이 거북돌이 서북쪽을 향하고 있지만 만약 반대쪽인 동남쪽으로 돌려 다시 다이마를 노려보게 하면 이 야마토분지는 대홍수가 나 늪지가 될 것이다』

이 전설에 나오는 상대방은 바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가리키는 방향이다. 한반도 도래인들이 조국을 그리워한 나머지 이런 전설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추측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아스카의 또 다른 수수께끼는 주선석(酒船石) 사카부네이시다. 파인 홈이 경주 포석정을 닮은 이 주선석이 위치한 곳은 비조좌신사(飛鳥坐神社) 뒤편 대나무 숲속이다. 현지 인들에게 주선석의 유래를 아느냐고 물으면 『이 바위 위에서 술을 빚었거나 기름을 짰을 것』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약을 만들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런 저런 추측도 다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래도 그 거대한 바위가 생활용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됐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파인 홈의 모양으로 봐 무언가 의 미있게 사용되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해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저 멀리 미미나시야마(耳成山)에 해가 기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그 옛날의 아스카를 그려 본다. 아스카촌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무언가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우리의 저녁 짓던 마을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날이 밝자 히노쿠마(檜猥) 언덕에 있는 다카마쓰총(高松塚)을 찾았다. 다카마쓰총은 아스카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70년대 초 세계적인 가전사(家電社) 마쓰시타(松下) 그룹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辛之助)옹과 컬러 TV 합작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다가 이 고분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옹은 당시 「아스카문화 고적보존회」 위원장을 맡고 있어 다카마쓰 고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지만 20여년 전 발견 당시만 해도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고분 봉토 위에 서 있어 고송총(高松塚)이라 이름붙여졌다.

내가 다카마쓰 고분을 처음 답사했을 당시에는 노송(老松)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80년대 후반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대나무 숲으로 뒤덮여 있어 「다케시타(竹下) 고분(?)」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만큼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1972년 3월21일 가시하라(彊原) 고고학 연구소가 이 고분을 발굴했을 때 석실안에서 채색 벽화가 나타나자 조사단은 즉시 발굴을 중단하고 다시 묻어버렸다. 출토된 벽화가 옛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와 꼭 닮았기 때문이다. 당시 발굴을 총지휘했던 고고학자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 고분의 벽화는 조선의 벽화와 유사하며 아마도 귀인(貴人 )의 분묘 같다』고 말하고 발굴을 중단한 채 함구하고 있다가 몰래 발굴을 재개했었다.

석실벽에는 중국과 한국에서 예부터 임금을 상징해온 사신도(四神圖)인 청룡(靑龍:동쪽벽), 백호(白虎:서쪽벽), 현무(玄武:북쪽벽)가 그려져 있었고 도굴이 돼버린 남쪽벽의 주작(朱雀)도는 훼손돼 없어졌다. 동서 양쪽벽에는 금박과 은박으로 해와 달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좌우에는 네 명씩의 여자군상(女子群像)과 남자군상(男子群像)이 각각 그려져 있다. 또 천장에는 북두칠성 등 20여개의 성좌도가 배치돼 있어 소우주를 상징하는 매우 희귀하고 귀중한 고분으로서 문화적으로나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일본 궁내청은 이 고분의 보존 유지를 위해 막대한 경비를 들여 물리화학적인 모든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최첨단 시설을 석실 입구 아래쪽에 설치해 놓고 컴퓨터로 보존 상태를 자동 조절 및 감시하고 있으며, 철책을 만들어 일반인의 고분내 관람은 물론 접근마저 일체 금지하고 있다.

다만 고분 입구에 벽화관을 따로 지어 고분의 단면모형을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내가 처음 가보았을 때는 철책을 설치해 놓지 않았을 때여서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도 내부는 튼튼한 철문에 자물통이 채워져 있어서 볼 수 없었다. 고분 내부는 발굴 당시의 발굴팀과 궁내청의 극소수 관계자만 보았을 뿐, 학자들마저 내부관람을 불허할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다.

이 고분의 피장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 고분 주변에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 고분군처럼 제29대 킨메이(飮明), 40대 덴무(天武), 41대 지토(持統), 42대 몬무(文武) 천황의 대형 능이 밀집해 있는 점으로 봐도 임금의 고분임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법륭사 금당벽화

야마토 평원의 중심지 나라시(奈良市)에 자리잡고 있는 법륭사(法隆寺), 즉 호류지는 고구려와 백제문화의 진수가 살아 숨쉬는 사찰이다. 부지만 해도 무려 22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사찰이며,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돼 「세계 보물 1호」로 지정돼 있다. 대부분의 사찰들이 소실된 후 다시 지었지만 이 법륭사만은 당초 건물이 현재까지 보존돼 내려오고 있어 그야말로 문화적 사찰이다.

이 법륭사에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약 50년 전인 1949년 1월 내부공사를 하던 중 전공(電工)의 조그만 실수로 12개 벽면에 그려진 세계적인 벽화가 모두 불타버린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후일 화가들이 그린 모사품을 벽면에 끼워 놓 았지만 담징의 벽화에 비할 바가 못되며 그나마도 관람객에게 보여주기를 꺼리고 있다.

또 법륭사에는 세계 불교미술의 최고봉이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은 「백제관음상」이 보존돼 있다. 현재 대보장전에 보관돼 있는데 높이 2백10cm의 우아한 자태와 단아한 아름다움은 불교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백제관음상에 서면 우선 온몸으로 전해오는 짜릿한 감동에 전율을 일으킨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그 아름다움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표현할 수 없으며 최첨단 영상기자재로도 그 진실된 모습을 담을 수 없다.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것의 아름다움, 우리 문화의 훌륭함을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문화를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관계 당국자들이나 역사를 가르치는 학자들이 백제관음상을 못보았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음을 권한다.

이처럼 일본의 나라에는 백제의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데 반해 부끄럽게도 우리나라 부여나 공주는 백제문화의 폐허나 마찬가지다. 백제문화를 보려면 일본의 나라를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 역사의 아픈 비극인 것이다.

일본에서 느껴지는 백제인의 숨결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백제에서 건너간 로벵(良辨)의 책임하에 건립된 「나라의 얼굴」 도다이지(東大寺) 역시 호류지(法隆寺)와 더불어 세계 문화재로 등록된 사찰이다. 도다이지에 안치된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은 역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데 그 높이가 22m에 달한다. 쇼무(聖武) 천황 때인 749년에 완성된 이 불상은 주조에만 3년이나 소요되었는데 역시 백제 조불사(造佛師)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동대사의 장엄한 규모에 넋을 잃은 채 남대문을 나서노라면 방목하고 있는 사슴들이 다가와 먹을 것을 달라는 시늉을 하거나 졸졸 따라다닌다. 나라에 처음 입성(入城)한 장군이 백마를 타고 사슴을 가져왔다는 전설에 따라 나라의 상징 동물이 되었으며, 나라 공원내에 자리잡고 있는 동대사에 방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감추는 일본인들

동대사 옆 낮은 동산에 가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신국신사(辛國神社)가 자리잡고 있다. 동대사 관람객 십중팔구는 그냥 지나쳐버릴 정도로 내버려진 외진 곳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신사가 한국인들의 혼령을 모신 우리들의 신사다. 즉 나라에서 숨져간 한반도 도래인들의 혼령을 모신 곳이다. 신사 이름은 처음에는 「한국신사(韓國神社)」였지만 명치유신 때 韓자와 똑같이 「가라(から)」로 소리나는 辛(매울신)자를 써서 신국신사, 즉 가라쿠니신사로 개명해버린 것이다. 한국을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꾸준히 진행해온 역사 인멸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나라에는 동대사와 서대사에 이어 남대사로 속칭되는 백제대사가 있었으나 서기 1017년 지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기록에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 그 환상의 절터가 발견되었다는 외신보도가 있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백제대사는 일본의 7대 명찰이면서 동시에 일본에 르네상스를 일으킨 성덕태자(聖德太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성덕태자는 백제의 혜총과 고구려의 혜자법사에 의해 불교에 귀의하였고 그 불력(佛力)으로 왕위에 등극했다고 믿고 있던 백제 서명왕(舒明王)이 백제천(百濟川)변에 대찰을 지어 백제대사로 이름붙인 후 성덕 태자의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이처럼 백제대사는 일본 최초의 왕립(王立) 사찰임과 동시에 백제 망명정권의 원찰(願刹)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찬란했던 백제불교의 진정한 모습이 또 하나 복원되기를 기대해 본다.

신라가 이민족(異民族)인 당(唐)나라를 한반도에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곧 세계에서 가장 섬세하고 훌륭한 문화를 말살시켜버린 것이다. 참으로 애석해서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생각은 야마토 평원의 교토(京都)에 자리잡고 있는 광륭사(廣隆寺), 즉 고류지에 가서 보면 더욱더 아픔으로 마음을 저미어 온다. 일본 국보 제1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 이는 우리 한국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백제에서 만들어 가져갔거나 아니면 건너간 백제인들이 만들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 재질 이 한국산 적송(赤松)임이 이를 증명해 준다. 불공을 드리는 불자(佛子)의 발등에 떨어지는 그 시선과 잔잔한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순화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지난 80년대 초반 미륵보살의 매력에 감동한 일본 관람객이 불상을 껴안는 바람에 불상의 새끼손가락이 잘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 관람객은 당황한 나머지 잘라진 새끼손가락을 가지고 줄행랑을 쳐버렸다. 언론의 간절한 노력으로 그 새끼손가락을 다시 찾아 접합했는데 범인은 대학생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한국의 사학계를 흥분시키고 말았다. 절단된 새끼손가락의 단면 재질을 정밀 분석해 보니 한국산 붉은 소나무(赤松)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어서 그 흥분은 더 했던 것이다.

광륭사 역시 백제에서 건너간 하타카와카쓰(秦河勝)가 축조하여 그의 성(姓)을 따 진공사(秦公寺), 태진사(太秦寺), 또는 진사(秦寺)라고 불린다. 하타카와카쓰는 일본에 술을 만드는 법과 양잠, 농경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산업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기도 하다. 교토의 마쓰오대사(松尾大社)는 하타씨(秦氏) 부처(夫妻)를 신체(神體)로 조각하여 제신으로 봉안하고 있는데 일명 「주조신사(酒造神社)」라고도 불린다.

이처럼 일본 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백제를 일본인들은 「큰 나라(大國)」로 불렀다. 백제의 일본 표기는 구다라(百濟)인데 큰 나라 → 쿠나라 → 구다라로 바뀐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금도 일본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말 중에 「구다라 나이(百濟無い)」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백제가 없다」인데 속뜻은 백제 것이 아니다, 즉 백제 것이 아니면 쓸모가 없다라는 말로 「백제 것이면 무엇이든지 최고」라는 속담이 된 것이다.

백제는 이처럼 일본 사회에서 선민의식, 즉 우월감으로 표출되어 자신의 성(姓)을 백제와 연관하여 짓는 경우도 허다했다. 「구다라」라는 성씨도 있고 또 부여의 여(餘)자를 따 성을 삼기도 했으며 남원의 남바라(南原), 충주의 옛 지명인 중원을 따 나카하라(中原) 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오늘날 그 후예들이 많이 살고 있음이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준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백제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지명도 무수히 많다. 백제군, 백제면, 백제역, 백제천, 백제교, 백제천역, 백제촌, 백제고개, 백제산 등이 있는가 하면 오사카에는 오사카시립 남백제소학교도 있다.

백제왕족의 슬픈 전설

백제의 유적은 대부분 야마토 평원에 밀집해 있지만 규슈(九州)에도 일부 남아 있다. 규슈 미야자키(宮崎)현 동부해안의 휴가(日向)시에서 서쪽으로 40여km 들어가면 난고 손(南鄕村) 또는 구다라노사토(百濟の里)라는 아담한 산중 마을이 있다. 남쪽에 고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을이란 뜻의 남향촌은 이름 그대로 옛 백제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휴가에서 자동차를 타고 국도를 따라 달리다 보면 길 위로 「百濟の里, Kudara no sato, 백제마을」이라고 한문, 영문, 한글로 쓴 대형 이정표가 자주 눈에 띄고 산언저리에 도「南鄕村」이라고 쓴 초대형 마을 간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 마을에는 백제왕의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서기 660년 백제가 망한 후 일본에 건너간 여러 왕족 중에 정가왕(禎嘉王)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정가왕은 그의 장남 복지(福智), 차남 화지(華智)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규슈의 남쪽 사쓰마국에서 살다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규슈 동쪽 휴가국(日向國)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배를 타고 건너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목선(木船)이 난파되는 바람에 파도에 떠밀려 아버지 정가왕은 두 아들과 헤어진 채 살게 되었다.

정가왕 일행은 휴가 해안의 가네카하마에 표착했고 장남 복지 일행은 30km나 떨어진 가쿠치우라에 표착했다. 아버지 정가왕은 산중에 있는 미카도(神門)에 살았고 아들 복지는 히키(比木)의 기조초(木城町)라는 곳에서 살게 되었는데 수년이 지난 후 서로의 소식을 알게 됐다. 그후 매년 한 차례씩 부자(父子)가 상봉하면서 나름대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왕족의 소재를 찾고 있던 추격군이 눈치채 정가왕이 있는 미카도로 쳐들어 왔다. 히키의 복지왕도 그 소식을 듣고 급히 미카도로 구원군을 데리고 와 응전했으나, 아버지 정가왕과 장남 복지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戰死)하고 말았다.

왕은 미카도 입구의 쓰가노하루(塚の原)에 묻혔으며 그의 높은 인격과 식견에 한없는 존경심을 가졌던 후세 사람들은 그곳에 미카도신사(神門神社)를 세워 미카도대명신(神門大明神)으로 모셨으며 그의 아들 복지도 사후 히키신사(比木神社)의 대명신으로 받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왕족 부자가 매년 한 번씩 상봉하는 대면의식(對面儀式)을 양쪽 마을 사람들이 시와쓰마쓰리(師走祭)로 승화시켜 축제를 갖는데, 축제라기보다 슬픔이 가득 찬 행사다.

3일간의 행사가 끝나고 히키마을 사람들이 떠나는 날이면 마쓰리에 참여했던 사람이나 곁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고 한다. 천수백년 전 의 역사적인 사실(史實)들을 축제로 재현해 이어가고 있는 일본인들의 높은 문화의식이 경제대국 일본을 만든 원동력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다.

이같은 역사적 인연으로 미카도에는 백제 정가왕족의 후손들이 모여 살게 되었으며 마을 이름도 남향촌(南鄕村) 또는 구다라노사토로 불리게 된 것이다. 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몇해전 미야자키시와 충남 부여시는 자매 결연을 하고 본격적으로 백제 마을을 가꾸게 되었는데 두 도시간의 우의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두텁다. 매년 우정의 사절단이 교환 방문을 하는가 하면 부여시 직원이 교대로 백제마을에 파견돼 근무하기도 한다.

마을 한복판에는 백제의 옛 수도 부여의 왕궁터에 있는 객사(客舍)를 그대로 본떠 만든 백제관(百濟館)이 있는데 두 도시의 공동 작업으로 건립돼 자료관과 영빈관으로 사용 되고 있다. 또 백제관 뒤편 「연인의 언덕」에는 부여 낙화암의 무대인 백화정(百花亭)을 그대로 본떠 만든 백화정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는 부여시가 기증한 종이 걸려 있다.

두 도시간에 서로 실처럼 끊어지지 않은 우의(友誼)를 돈독히 하며 그 정을 계속 이어가자는 뜻으로 반종(絆鐘)이라 명명되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사랑을 속삭이면 그 종소리에 사랑이 결실한다는 이 「연인의 언덕」은 청춘 남녀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다고 마을 아낙이 웃으며 얘기한다.

이곳 백제마을 한복판에는 최근에 원목으로 만든 건물이 있는데 그들은 「서 정창원(西の正倉院)」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있는 정가왕의 미카도신사에서 몇 해 전 구리거울, 검, 곡옥 등 수백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이를 보관하는 장소다. 그리고 나라에 있는 정창원(외국에서 일본에 보내온 여러 가지 물품들을 보관하는 곳) 이름을 그대로 본떠 서 정창원, 즉 니시노쇼소인(西の正倉院)이라고 명명한 것.

이를 건립하려고 미야자키현청과 백제마을 사람들은 눈물겨운 모금 활동을 벌여야 했고, 수백년 된 노송(老松)을 구하기 위해 혼슈(本州)의 북쪽 끝 아오모리(靑森)현까지 가서 사와야 했다. 정창원 건립에 사용될 노송을 그들은 「어목(御木)」이라 부르고 마치 신을 모시듯 신성시했으며, 마을에 어목이 하나씩 반입돼 올 때마다 모든 마을 사람 들은 일손을 놓고 한바탕 축제를 벌이면서 조심스럽게 맞아들였다. 수년의 노력 끝에 1996년 2월에 모든 공사가 끝났고 5월1일에는 성대한 준공식을 가졌다. 그들의 소원대 로 백제 왕족 정가왕의 모든 유물이 한곳에 모인 것이다.

처음 미카도신사에서 구리거울이 발굴돼 언론에 보도되자 일본 사학계는 또 한번 놀랐다. 나라의 정창원에 보관중인 구리거울과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구리거울, 즉 신경(神鏡)은 검(劍)과 곡옥(曲玉)과 더불어 일본에서 왕권을 상징하기 때문에 신기 3종(神器三種)이라 부른다.

오늘날 일왕의 즉위식에도 이 신기3종이 수여되고 있다. 고대 한반도의 삼국과 가야의 왕릉에서도 왕권을 상징하는 이 신기3종이 자주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문화 역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혼이 살아 숨쉬는 야마토평원과 규슈 미야자키의 백제마을을 살펴보니 무언가 허전하고 아쉬움만 남았다. 그처럼 찬란했던 백제 유적이 한국에는 빈약하기 그지없는데 일본에서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고도(古都) 부여가 당나라 소정방에게 함락될 때 소정방군이 지른 불로 도시 전체가 불타는 바람에 찬란한 백제문화는 잿더미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참으로 애석한 전쟁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 神에게 소원빌고 출세한 일본 정·재계 인사들

 

《한국인과 일본인은 유전자 분석 결과 다른 어떤 종족보다 일치하는 점이 많은 걸로 나타났다. 그들이나 우리나 한 조상을 두고 있다는 뜻인데, 일본인들은 지금도 열도에 산재한 한국의 문화적 흔적을 지우려 애쓰고 있다. 자기네 조상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도쿄(東京)의 이케부쿠로(池袋)역에서 도부토조센(東武東上線)을 타고 40분쯤 달려 가와고에역(川越驛)에 내리면 사이타마(埼玉)의 고려천역(高麗川驛)에 가는 전동차가 항시 기다리고 있다. 전동차를 갈아타고 20여분 달리니 종착역인 고려천역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네 한적한 시골역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역전에는 「고려천 택시(高麗川 TAXI)」라고 쓰인 초록색 택시가 10여 대씩 대기하고 있는데 마치 한국의 지방 소도시에 도착한 듯한 착각마저 준다. 고려천 택시 뿐만 아니라 역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세워진 건물들에는 「高麗○○○」라는 간판들이 즐비하다.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고려(高麗)라는 명칭이나 지명은 거의 예외없이 고구려 (高句麗)를 지칭함은 두말할 나위없다.

이 지방에서 만난 토박이 주민들은 물론 일본말을 사용하지만, 나는 그들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에게서 규슈의 가야 후손, 나라의 백제 후손과는 또달리 어쩐지 대륙적 기질이 엿보임도 느꼈다. 이번 답사에 함께한 일행도 나의 느낌에 동조하는 듯했다.

사실 한반도로부터 일본 열도로의 문화 이전은 흡사 도도한 물줄기처럼 끊임없이 진행돼 왔다. 문화 이전은 곧 사람의 이전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반도 도항민(渡航民)들의 이주는 지리적 여건과 주변국 상황에 따라 그 경로가 각각 달리 나타난다. 가야는 일본 규슈(九州)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었기 때문에 대마도와 이키(壹岐)섬을 징검다리삼아 일찍이 규슈 일대를 개척했으며, 백제는 남해안을 거쳐 세토내해를 따라 오사카로 상륙해 야마토(大和) 평원, 즉 나라(奈良)지방에 정착하였다.

고구려인들은 조류가 순탄한 서해를 따라 남하하다가 일부는 규슈 가고시마(鹿兒島)에 정착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지금의 나고야(名古屋)시 근처에서 거마군(巨摩郡)을 이루어 살다가 그후 도쿄 인근 오이소(大磯)해안으로 상륙, 사이타마에 정착하여 고려본향(高麗本鄕)을 이루었다. 바로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신라는 비교적 순조로운 동남해 조류를 타고 시마네현(島根縣)의 이즈모(出雲)와 오타(大田) 지방으로 상륙, 정착하였다. 여기서 일부는 니가타현(新潟縣)의 사 도시마(佐賀島)에 집단 거주하게 되었고 다른 신라인들은 오사카와 교토(京都), 그리고 멀리 규슈 가고시마(鹿兒島)에까지 그들의 세력을 뻗치기도 했다.

이처럼 한반도의 제국은 마치 일본 열도에 식민지를 개척하듯 그들의 세력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점은 한국의 신생아들과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에서 태어나고 있는 신생아의 엉덩이나 허리께에 푸른색 반점, 즉 몽고반(蒙古斑)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를 인류학적으로 고찰하면 일본인 대부분은 남방 해양세력보다는 한국인처럼 북방 대륙계 세력임을 알 수 있다. 즉 한국인이나 일본인은 동족이라는 것이다. 사업차 수십 년 동안 일본을 드나들면서 보아온 일본인들의 모습이나 생활방식이 우리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흡사하다는 것도 역시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인구가 오늘날 일본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일본학자들 사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한일 고대사를 연구하는 동경대학교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 교수는 그의 저서 『한반도를 경유한 아시아 대륙인』에서 『인류학적 시각에서 고찰해보면 한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이주족(移住族)과 일본 원주족(原住族)의 비율은 대략 85 대 15』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이주족들은 나라시대까지도 한복(韓服)을 입고 한국 음식을 즐겨 먹었으며 심지어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 「만엽집(万葉集)」 등의 책에서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에는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 있다』는 것.

일본인들의 고구려 흔적 없애기

그러나 양심적으로 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인정하는 학자보다는 일본 열도 곳곳에 나타나는 한반도 것을 어떻게 해서든 인멸 내지 왜곡시키려는 사람들이 더 큰 힘을 발휘 하는 것 같다.

고려천역이 있는 사이타마현의 고려향은 원래 고마군(高麗郡)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려왔는데, 결국 일본인들에 의해 수난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고려라는 명칭을 없애기 위해 고마군을 이루마군(入間郡)으로 바꾸고 이를 다시 히다카시(日高市), 쓰루가시마시(鶴ケ島市), 한노우시(飯能市)의 3개시로 분할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은 고려향이 히다카시에 속한 조그만 고장 이름에 불과하다.

고마군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해서 없어져 버렸지만 다행히도 히다카시에는 아직도 곳곳에 고구려와 관련된 지명과 고구려 유적이 산재한다. 고려향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산을 고려산(高麗山)이라고 하며, 고려향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맑은 시내를 가리켜 고려천(高麗川)이라고 한다. 특히 고려천은 시냇물을 그냥 마셔도 될 만큼 일년 내내 1급수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고려천을 가로질러 세워진 고려교(高麗橋)에서 한가로이 흐르는 냇물을 굽어 본다. 이 다리는 일명 「출세교(出世橋)」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고려교를 지나 바로 맞닥 뜨리게 되는 고려신사(高麗神社)가 출세운을 열어준다는 「출세개운(出世開運)」의 신사로 지칭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출세를 위해 자기네 나라 신이 아닌 고구려 신을 찾아가 절 하고 소원을 빈다. 또 일본의 양심있는 학자들은 자신들이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의 후예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은 왜 자신들의 조상을 부인하고 역사적 지명과 유적마저 말살하려고 할까. 결국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인데도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역사를 변조, 왜곡하는 데에 대단한 집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변조가 가능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의 모호한 표현 때문 일 것이다.

일본어는 음독과 훈독만으로도 외국인들이 공부하는 데 엄청난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의 단어가 두세 가지로 발음되는 것은 보통이고 어떤 단어는 일곱 개의 각각 다른 음으로 말할 수 있다. 또 같은 발음이지만 전혀 뜻이 다른 단어들도 부지기수다. 외국인들이 일본인에게 그런 단어를 어떻게 분간하느냐고 물으면 그들도 암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이처럼 그들만이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일본어의 특성(?) 때문에 그들은 역사적 지명에서도 발음은 그대로 두면서도 단어를 제멋대로 바꿔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문 화 유적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왜곡돼 있는데, 그들이 바꿔친 단어조차도 원래 말과는 사뭇 다른, 엉뚱하고도 저속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아래 표는 그런 예들이다.

즉 한국신사는 발음이 같은 신국신사(매운 나라 신사)로, 신라신사 역시 같은 발음을 이용해 무명나무 신사로 둔갑시켰는가 하면, 고려강은 사나운 짐승 강으로 비하됐고, 한 국 동자들의 춤(무용)은 엉뚱하게도 당나라 동자들의 춤으로 국적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다.

고구려 족보 지켜오는 후손들

나는 씁쓸한 마음을 고려천 냇물에 흘려보내고 고려신사로 발길을 돌렸다. 고구려 출신의 약광왕(若光王)을 제신으로 모신 이 신사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한이 절절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몇년 전 이 신사에서 궁사(宮司: 우리나라 절의 주지와 같은 직책)를 맡고 있는 고마 스미오(高麗澄雄)가 학계의 초청으로 내한한 적이 있었다. 그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제28대 보장왕(寶藏王)의 후손으로 고려향의 개척자인 약광의 59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국을 잊지 말라는 결의를 다지고 슬기롭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과시하기 위해 고마(高麗), 즉 고려라는 성을 지켜온다. 아직까지 고려인들의 족보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처럼 서기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이역 만리 일본 땅에서, 그것도 1천3백년이라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서까지 고구려 후손임을 당당히 밝히면서 고구려 조상을 섬기는 신사를 지키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민족인 것이다.

고려신사 입구에는 이 신사의 내력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씌어 있는데 그대로 옮겨본다.

『고려신사는 고구려국의 왕족인 고려왕 약광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중국대륙의 송화강 유역에 살았던 기마민족으로 조선반도에 진출하여 중국대륙 동북 부로부터 조선반도의 북부를 영유하고 약 3백년간 군림했다. 그후 당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서기 668년에 멸망했다. 이때의 난을 피해 고구려의 귀족과 승려들이 다 수 일본으로 건너와 주로 동국(東國)에 살았으나, 레이키(靈龜) 2년(716년)에 그중의 1천7백99명이 무사시국(武藏國)에 옮겨져 새롭게 고려군이 설치되었다.

고려 약광왕은 고려군의 군사(郡司)로 임명되어 무사시노(武藏野) 개발에 힘썼으며, 다시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여기에 묻혔다. 군민(郡民)은 그의 유덕을 기리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명신(高麗明神)이라고 하며 숭배해 왔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려왕 약광의 직계자손에 의해 신사가 지켜져 왔으며 지금도 많은 참배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고구려의 지속 연수를 3백년으로 잘못 설명한 것을 빼고는 고려 약광의 존재가 당시 일본 사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더욱이 이 신사의 제신 인 약광왕이 출세개운(出世開運)의 신이라는 점도 남다른 대목이다. 역시 기록을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답게 신사 안에는 「출세명신의 신」에 대한 안내판이 또 세워 져 있었다.

『이 신사는 멀리 나라시대 겐쇼오(元正)천황 때 고려군을 통치했던 고려왕 약광을 기리는 신사다. 따라서 그 창건은 1천2백여년 전의 옛 관동지방에 속한 유서깊은 신사다. 이 신사는 기원(祈願)을 잘 들어주는 영험한 신사로 알려져 고려군의 총진수(總鎭守)로서 군민에게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특히 오늘날에 와서는 미즈노(水野), 하마구치(浜口) 등 5명이 이곳에 참배한 후 계속해서 총리대신(總理大臣) 또는 국무대신에 취임하는 등 출세를 함으로써 출세 관련 신으로 신봉(信奉)됐다. 이 신사는 정계, 재계를 시작 으로 해 각계 각층의 숭배와 공경을 받아 전국적으로 숭경자(崇敬者)들이 널리 퍼져 있다』

현재도 일본의 정·재계를 주름잡는 거물들이 그들의 출세를 빌기 위해 고구려 신을 찾는다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다. 바로 약광왕이 살아 있었을 당시에도 일본의 실력자들 은 약광왕을 찾아 한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일본에서 비중 있는 인사들이 참배하는 고려신사는 그 규모나 대우 면에서 일본 곳곳에서 허름하게 버려져 있는 한국계 신사와는 여러 모로 대비된다. 특히 도 쿄 인근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오이소(大磯) 해안에 세워진 고려신사는 이곳의 고려신사와 이름은 똑같지만 처지는 너무나 다르다.

오이소의 고려신사는 오이소 해안으로 상륙한 고구려인들 대부분이 사이타마현으로 이동할 때, 일부가 그대로 오이소에 머물면서 세운 신사다. 그들은 오이소 해안 동쪽에 높이 솟은 산을 고려산으로 명명하고 고려산 언저리에 고려신사(高麗神社)를 지어놓고 그들이 숭경하는 조상신을 모셨다. 그러다 1945년 8·15 광복을 전후해 고래신사(高來神社)로 개명당하고 말았는데, 당시 이 지방 유지들의 강한 불만과 반발 속에서 이같은 짓이 저질러졌던 것이다.

사자의 울음소리

한편 고려신사의 입구 참도(參道)에는 히다카시(日高市) 지정 민속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는 사자무상(獅子舞像)이 세워져 있다. 어느 시대에 세워졌는지 확실치 않지만 사자상은 고구려 씨족들의 기원을 이루어주는 것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매년 10월19일 대제일(大祭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암수 사자상 앞에서 무엇인가를 기원하 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신사 안내책자에는 『애조 띤 울부짖음, 소박한 사자의 춤은 고대의 로망스를 불러일으킨다』고 하고 또 『산속에서 울부짖는 사자의 소리는 고려의 소리를 생각나게 울려퍼 진다』라는 노랫가락도 전해 내려온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사자를 구슬프게 노래한 것은 고구려인들의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음에 틀림없으리라.

고려신사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본 다음 그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가 주택(高麗家住宅)을 찾았다. 고려가(高麗家) 역시 일본정부 지정 중요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에도시 대(江戶時代) 초기의 중요한 민가(民家)로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 건축물은 16세기 말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평 35.7평에 동향(東向)으로 지어진 고려가는 입모옥(入母屋) 방식의 외부구조를 하고 있다. 즉 지붕꼭대기는 한자의 입(入)자처럼 서로 맞붙게 하고 처마 쪽은 사각으로 경사지게 하여 하늘에서 보면 마치 어머니 모(母)자처럼 보이게 띠로 이은 집이다.

다섯 개의 방 중 바깥쪽 방이 제일 넓어 다다미 21개가 깔려 있고, 나머지 방은 이 방을 중심으로 안쪽의 벽으로 배치돼 있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큰 방에는 우물 정(井)자로 짠 발이 쳐져 있다.

부엌은 우리의 시골집 아궁이와 꼭 같았는데 전기 장치로 장작에 불이 타고 있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일본의 여느 가옥구조와는 다른 고려가는 아마도 고구려의 전통가 옥 구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가를 나선 후 고려산 동쪽 자락에 고구려 승려들이 세운 성천원승락사(聖天院勝樂寺)와 경내에 모셔진 약광왕의 묘지인 고려왕묘를 둘러보고서 다음 일정을 위해 고려 역으로 갔다. 대체로 도쿄에서 고려향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고려천역에 내려 이곳저곳을 둘러본 다음 다른 역사인 고려역으로 찾아가게 마련이다.

신기하게도 고려역전에도 고려신사 앞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한국의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마을 어귀에 세워 마을 수호신으로 삼아왔던 천하대장 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의 모습 그대로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장승을 그대로 옮겨와 「장군표(將軍標)」라고 부른다. 장승 옆에 세워놓은 장군표의 안 내문은 친절하게 한국장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선에는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장군표가 있다. 높이 4m 정도의 소나무 자연목에 안광(眼光)이 날카롭고 무서운 형상의 얼굴이 새겨져 있으며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의 문자를 새겨넣어 재난과 위험을 방제(防除)하고 또 악마를 퇴치하며 가내 안전을 기원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네 토속신앙의 상징인 장승이 일본에서 그 유래를 적은 안내판과 함께 오늘에까지 전래되고, 또 세계 각국의 관람객이 오가는 고려역사 앞에 세워져 있다는 것은 고려향 에 살고 있는 고구려 후예들의 정신과 혼이 이 땅에 살아 있음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장군」이라는 명칭도 일본 것이 아닌, 우리 고유의 장승이라는 의미를 그대로 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일본에서 찾은 한국 동자무(童子舞)

일본은 한국에서 도래한 문화 중 눈에 보이는 것은 어떻게든 왜곡시키려 한다는 점은 누누이 목격해온 바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한국계 무형문화 중 요행히 살아남아 그 옛날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도 더러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오카야마현(岡山縣) 오쿠군(邑久郡) 우시마도정(牛窓町)의 전통춤인 동자무(童子舞)를 들 수 있다. 앞에서 잠깐 밝혔다시피 이 동자무의 원이름인 가라 코오도리(韓子踊)는 일본어로 똑같은 발음이 나는 당자용(唐子踊)으로 개명돼 마치 중국 당나라에서 유래한 전통춤인 것처럼 포장돼 있다. 그러나 이름은 바꿀 수 있어도 그 내용까지는 일본인들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수년 전 사업차 일본에 갔다가 우연히 알아낸 일이다. 호텔에서 무심코 TV를 켰는데 마침 NHK-TV에서 「도래(渡來)의 예능」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기에 관심있 게 봤더니 뜻밖에도 우리 한국의 동자무였던 것이다. 춤을 추고 있던 동자들의 무복(舞服)이 우리네 소년 소녀들이 입은 옷과 너무나 똑같아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화면을 계속 지켜보았다. 폭이 넉넉한 바지에 천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고 발목은 우리 한복의 대님과 똑같은 끈으로 묶었으며 저고리와 머리에 쓴 무모도 우리것 그대로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동자들이 춤을 추며 소리지르는 춤말이 「오슈운데」 「하슈운데」여서 혹시 우리말이 아닌가 가슴을 설레는데, 해설자 역시 『이 말은 오셨는데, 하셨는 데라는 한국말에서 유래된 것 같다』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사라져가고 있는 동자무가 놀랍게도 일본에서는 비록 이름은 바뀌었을지언정 소프트웨어는 계승되고 있는 현장이었다. 부드러운 선율과 흥겨운 가락에 맞 춰 춤을 추고 있는 이국 동자들 대신 우리의 꼬마들이 신명나게 춤을 추는 모습을 한국에서 그 언제나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무엇을 빼앗겨버린 듯한 마음에 그날 밤을 꼬박 설칠 수밖에 없었다.

신라인들의 일본 도항은 주로 북륙지방(北陸地方)과 시마네현(島根縣)의 이즈모(出雲)와 오타(大田)지방을 통해 이루어졌다. 니가타(新潟)와 토야마(富山), 이시카와(石川), 후쿠이(福井) 등 동해와 인접해 있는 북륙지방은 지금은 일본 열도의 뒤쪽이 돼버렸지만 고대 한반도로부터 문화이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때는 일본의 앞쪽, 즉 현 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도 이 지방 해변에는 한반도에서 대한해협의 조류를 타고 흘러온 플라스틱 음료수병이 수북이 쌓여 있을 만큼 신라와 직결되는 매우 안전했던 해로(海路)였다.

대마도는 신라땅

뿐만 아니라 대마도에도 신라인들이 남긴 유적과 지명이 곳곳에 나타난다. 대마도 최남단에는 서라벌(徐羅伐)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며, 현존 지명인 게치(鷄知) 역시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이 지방 향토사학자는 게치를 『조국 계림국(鷄林國)을 잊지 말자는 뜻의 지명』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게치에 사는 현지주민에게 지명의 유래를 물어보니 『닭이 울어 새 벽임을 알았다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내게 반문한다.

이 두 사람의 대답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닭(鷄)이다. 그리고 닭에서 나오는 계란은 신라의 개국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왕의 난생신화(卵生神話)에 등장할 뿐만 아 니라 가야 김수로왕의 천강난생신화(天降卵生神話)에도 등장하는 상징적인 물증이다. 신라의 후예들은 이같은 신화 속의 물증을 신성시하며 1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근세 에까지도 이를 지키려 애썼던 것이다.

그 흔적이 니가타현의 섬 사도시마(佐賀島)에도 남아 있다고 해, 이를 확인해 보기 위해 니가타항으로 출발했다. 바다를 메워 만든 간척지에 세운 도시라 하여 니가타라고 불 리는 이 항구도시는 거친 대한해협의 풍랑을 막기 위해 4∼5km의 방파제를 쌓아 항구를 보호하고 있었다.

니가타항에서 사도시마까지는 배로 약 2시간 거리. 연락선이 니가타항의 긴 방파제를 빠져나오는 데만 30여분 걸렸다. 방파제를 탈출한 배가 좌현 쪽으로 방향을 90° 바꾸 니 한반도의 등 부위인 강릉을 향해 직진하는 방향이었다.

선실에는 사도시마에 대한 개략적인 안내판을 부착해 놓고 있었다. 이 섬은 면적이 8백75㎢ 로 일본의 4개 본섬을 제외한 7천여 개의 섬 중에서 가장 크다고 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이 섬의 생긴 모습이 흡사 한반도를 빼어닮은 것이 내게는 더 기이했다.

배가 차츰 섬으로 다가가자 멀리 사도시마의 묘견봉(妙見峯: 해발 1천12m)과 금강산(金剛山: 해발 9백62m)이 흰 눈으로 뒤덮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치 한반도의 금강산과 설악산에 흰 눈이 덮인 것과 흡사했다. 가야의 공주이자 일본 최초의 왕인 묘견의 이름을 딴 묘견봉이 이곳에 있다는 것에도 놀랐으나, 금강산은 또 왜 이곳에 있는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항구에 내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사도시마 최남단 오기마치(小木町)에 내리니 제법 큰 항구가 눈에 들어온다. 어선이 빽빽이 정박돼 있는 모습을 보니 사도시마 일대는 분 명 황금어장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다시 택시를 타고 비탈진 산길을 10여분 달리니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 시라기촌(白木村)이 나타났다.

섬에서 만난 신라의 후예

마을 입구에는 「여기가 시라기입니다(ここが 白木です)」라는 마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마을의 도로 건너편 바닷가에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흡사 사자머리 모양을 하고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바위가 바로 백목신자암(白木神子岩)이었다. 신라의 후예들이 이 바위 밑에서 수평선 건너편 한반도를 향해 향수를 달랬으리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백목신자암 바로 뒤편에는 새로 지은 조그만 신사가 아무런 표식도 없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몇년 전에 새로 지은 「시라기신사(白木神社)」라 했다. 배전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고 벽면에 조그마한 신전(神前)을 만들어 놓고 어떤 신을 봉안하고 있었다. 좀 떨어져 있긴 했으나 마을 뒷산 숲속에도 기와를 올린 시라기신사 가 있는데, 바닷가에 또다시 지어놓은 것을 보면 아마도 항수신(港守神)을 봉안하고 있으리라.

마을 앞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한가로이 뛰어놀고 있는데 휠체어를 탄 노인이 햇빛을 쬐기 위해 밖으로 나와 있었다. 가토(加藤力太郞)라는 이 노인은 시라기마을의 토박이 로 태평양전쟁 중에 하반신 불구가 됐다고 한다. 그에게 시라기 마을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에 의하면 시라기(白木)는 모두 세 곳의 마을로 나뉘어 있는데 제일 큰 동네가 시라기에서 남쪽으로 1km쯤 떨어진 사와사키(澤崎)로 24가구가 살고 있고, 중앙에 위치한 이곳 시라기(白木)에는 현재 8가구가 살고 있으며, 북쪽 해안으로 1km쯤 떨어진 미쓰야(三ツ屋)에 사는 3가구를 합해 총 35가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세 마을을 통칭해 시라기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마을의 가구수는 옛날부터 더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장남에게만 상속해주는 일자상속(一子相續)의 풍습을 지켜오고 있어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타지(他地)로 나가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 사는 남자들 이름에 장남이라는 뜻의 「타로(太郞)」가 많은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법 규제에 의해 사라져버린 관습이 이곳 사도시마에서는 풍습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여실히 나타내주는 또 다른 증거물이 규모가 가장 작은 미쓰야 마을이다. 미쓰야는 가옥이 셋이라는 뜻인데 옛날부터 이 마을은 세 가구밖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 을 이름을 「역사적으로」 그렇게 지은 것이라 한다.

중앙의 시라기에서 남쪽 해안으로 가면 터널이 있고 터널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 사와사키 마을. 동네 아이들이 할머니 등에 업히거나 손을 잡고 마을 어귀의 그네 터에서 놀고 있는 모습은 우리 한국의 어촌과 다를 바 없었다. 어느 집의 마당에 들어서니 할아버지가 가사를 돕고 있었고 할머니도 등에 지게를 지고 머리에는 흰 수건을 쓴 채 무엇인가를 나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여기가 일본이라는 것을 잊고 한국땅 어느 어촌에 여행왔다는 착각이 들었다. 마을의 포근한 정경에 넋을 잃고 한참을 둘러보는데 할머니 한 사람이 다가왔다. 나 는 그 노파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는데, 주로 시라기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시라기 사람들은 예부터 성격이 강인하고 독립심이 강할 뿐만 아니라 선천적으로 매우 부지런하다는 것이다. 가장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 뒷산에 있는 시라기신사 를 참배한 후 다시 집에 돌아와 기다리고 있는 가족과 함께 집안에 모신 불단에 엎드려 절을 하며 예를 올린 다음 비로소 아침식사를 한다는 것이다. 신사(神社)나 신불(神佛), 그리고 조상에 대한 그들의 신앙심은 이처럼 두텁다.

풍습 또한 우리와 유사한 것이 무척 많다. 우물가에 나란히 앉아 방망이질로 빨래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나, 신사에 참배하러 갈 때 목욕재계하고 흰 옷에 제복(祭服)을 갖추는 것이나, 제물 그릇을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 등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들이다.

또 이 마을 사람들은 과거 닭과 달걀을 매우 신성시했는데 요즈음은 그런 풍속이 거의 사라졌다는 노인의 얘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달걀 에서 나왔다 하여 달걀을 신성시했던 것이 신라인들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박혁거세 신사를 찾아

그러나 이같은 정신은 박혁거세를 제신으로 봉안하고 있는 신사의 숫자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일본열도 전역에 산재한 30여만 개의 크고 작은 신사 중에서 단일신을 봉안하 고 있는 신사로는 신라신사(新羅神社), 즉 시라기신사가 단연 최고다.

근세까지만 해도 2천7백여개나 있던 신라신사가 50∼60년 사이에 7백여개가 합사(合社)되거나 없어져 버렸고 지금은 2천여개가 남아 있다. 이 숫자 역시 적은 것은 아니다. 박혁거세나 신라의 훌륭한 조상을 제사지내는 신라신사가 아직도 2천여개나 남아 있다는 것은 신라인들의 신앙심과 투철한 민족혼이 어떠한지 엿볼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하 다.

또 일본에 살고 있는 신라인들은 그들의 성씨(姓氏)를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도 유달리 강했던 것 같다. 실제로 『속일본기(續日本記)』에 보면 제45대 쇼오무(聖武) 왕 때인 서기 773년, 일본 무사시노국(武藏野國) 사이타마현(埼玉縣)에 살던 신라인 53명이 성을 김씨(金氏)로 해줄 것을 청원해 허락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곳에 김씨가 많이 살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한편 신라유민들은 니가타현 외에도 교토와 오사카 그리고 멀리 규슈에까지도 그들의 세력을 뻗쳤는데 그 유적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교토(京都) 인근의 오쓰시(大津市)에 위치한 신라선신당은 8·15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어느 지도에서나 신라사(新羅社)로 표시돼 있었는데 현재는 미이데라(三井寺)로 바뀌어 있었다.

최근에 답사해 보니 신라사가 소재한 비예산 자락 초입에 있는 미이데라는 규모가 매우 크고 참배객들이 무척 많았지만 숲이 무성하게 우거진 신라선신당은 찾아오는 사람 도 드물고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거에 비와코(琵琶湖) 주변 일대에 절이라고는 신라사(新羅社)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30여 개의 절이 새로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신라사(新羅社)마저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으로 이름이 바뀌고 규모가 줄어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신라선신당이 비록 규모는 작지만 미이데라의 수호신(守護神)이라고 소개했다.

버려진 한국신들

혼슈(本州)의 주고쿠지방(中國地方)인 시마네현(島根縣)에 있는 한신신라신사(韓神新羅神社) 역시 초라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이즈모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오타시 오우라(大浦)항 포구에 있는 이 신사를 찾으려니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곳저곳에 수소문해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도대체 한신신라신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포기하고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 하나를 보기 위해 도쿄에서 이즈모까지 비행기로 날아온 마당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나의 노력에 하늘의 도우심인지, 신라 선인들의 안내 덕분인지 한적한 시골 국도에서 바닷가 쪽으로 1km쯤 들어간 조그마한 포구에서 나는 정말 우연히도 찾아낸 것 이다. 포구 입구에 누추하기 그지없는 기와집 한 채와 대리석 도리이(島居)가 쓸쓸히 서 있기에 혹시나 싶어 차를 세웠더니 바로 그 신라신사였던 것이다.

현해탄 건너 옛 신라땅이 수평선 너머로 보일 듯한 곳에 서 있는 신라신사는 찾는 이도, 관리하는 사람도 없어 버려진 신사나 다름없었다. 제신의 위패를 모시는 본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주위는 잡초만 무성하였는데, 최근에 세운 듯한 조그마한 후나다마신사(船玉神社)가 신라신사 경내 뒤편에 웅크리고 서 있었다.

이 신라신사의 원래 이름은 가라카미시라기신사(韓神新羅神社). 한국의 신을 모시는 신라신사라는 뜻으로 앞에다 「가라카미(韓神)」를 붙였던 것인데 누가 언제 그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도리이 위의 대리석 편액에 새겨 놓은 「韓神」이라는 두 글자를 망치 같은 쇠붙이로 두드려 마멸시켜 버렸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흔적에는 분명히 글자 형 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신라신사라고만 해도 그 뜻이 분명할진대 앞에다 「한국의 신」이라는 뜻의 두 글자를 더해 놓았던 철두철미한 한반도 도래인들의 혼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신사 바로 옆 오우라 마을은 옛 신라인의 후손들이 20가구 정도 모여 사는 평화스러운 어촌이었다. 모두들 생업에 종사하느라 바쁜 모습이었고 길가에는 어린이가 강아지를 데리고 놀고 있는 모습이 정겨웠다. 가을 햇볕이 따사롭게 비치는 오우라 마을을 뒤로 하고 왼쪽으로 펼쳐진 현해탄을 바라보니 수평선 너머에 한반도가 다가오는 듯했다.

한편 규슈 가고시마현 다루미즈시(垂水市)에는 박혁거세왕을 제신으로 모시는 거세신사(居世神社)가 있다. 이 거세신사는 가고시마시와 다루미즈시 경계에 위치한 거세마 을(居世村) 뒤 국도변에 자리잡고 있는데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초라해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규모도 규모거니와 서쪽에 있는 가고시마의 사쿠라지마(櫻島)에서 편서풍을 타고 끊임없이 날아오는 화산회(火山灰)가 2∼3cm 쌓여 흡사 신사에 흰 눈(雪)이 내린 것처럼 화산먼지 투성이였다. 참배는커녕 걸어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나마 신사 입구 국도변에 서 있는 자그마한 도리이(鳥居) 옆 잡초 속에 흰 페인트칠을 한 각목(角木)에 검 은 글씨로 거세신사(居世神社)라고 쓰인 작은 팻말이 이곳이 신라의 신사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표였다.

사쿠라의 진정한 의미

한편 사쿠라지마는 옛날 화산활동이 없었을 때 벚나무인 사쿠라나무(櫻木)가 해안을 따라 숲을 이뤄 봄이면 사쿠라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섬이었으나, 근세에 화산이 폭발 하면서 용암이 섬에 있는 사쿠라나무와 모든 식물을 덮어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지금은 휴화산으로 수천 가구가 들어가 살고 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엄청난 회색먼지를 내뿜으며 폭발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이곳 주민들은 태연하기만 하다.

그런데 사쿠라지마는 사쿠라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는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인다. 우리는 흔히 진짜가 아닌 가짜나, 줏대없 이 흔들리는 사람 또는 모사꾼을 일컬어 「사쿠라」라고 한다. 이는 지명은 분명 사쿠라(櫻島)인데 실제로 보면 사쿠라 나무도 없고 사쿠라꽃도 피지 않는 섬을 빗댄 것이다.

나는 그간 사업일로 무척 바쁜 몸이었지만 틈나는 대로 일본에 산재한 우리 조상들의 문화유적과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내 나름대로 여러 가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태평양전쟁에서의 패전국 일본이 승전국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이 된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자는 데 가장 큰 의미를 두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의 예측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근면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매사에 철두철미한 일본인들의 정신적 원류는 유교와 불교의 정신에 바탕을 둔 조상숭배 정신 과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확실히 느꼈다.

그들의 훌륭한 조상들은 우리의 옛 조상과 같은 뿌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 핏속에도 슬기로운 우리 조상들의 정신이 흐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 피를 이어받은 우 리가 더욱 노력한다면 머지 않은 날 일본을 능가하는 결과를 일궈낼 수 있음도 당연하다.

그러나 작금의 어지러운 정치행태와 무질서한 경제질서 속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건전한 가치관마저 혼탁해져 버린 것같아 가슴이 답답해진다. 게다가 21세기 세계 경제의 주무대를 꿈꾸고 있는 아시아 제국의 기지개는 우리에게 심상찮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제 우리 국민 모두가 정신을 가다듬고 심기일전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 후손들이 한반도에서 그 결실을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정리 :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AT Field  (0) 2020.12.20
Tinker Tailor Soldier Spy  (0) 2020.10.18